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이지 Oct 19. 2020

당연해 보였던 일들

첫 번째 반전




이전까지 고양이 카페의 아이들이나 친구들의 집냥이들만 봤던 우리는, 우리가 잠시 탁묘했던 티봉이 정도는 성격이 좋은 편의 고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우리가 고양이를 입양하면서 산산조각 깨지게 되었다. 분명 우리는 지난 1년 간 반려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공부해왔는데도 예상치 못했던 엄청난 반전이었다. 티봉이는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 정말 엄청나게 친화력이 좋은 상위 1% 고양이였던 것이다!


일단 티봉이는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 바로 이동장에서 나와 새로운 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고 처음 보는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의 체취를 묻혔다. 또 다른 친구의 반려묘 ‘홍삼이’도 있었는데, 홍삼이는 우리가 그 집에 들어감과 동시에 침대 밑으로 숨어버렸지만 집사가 안아서 꺼내자 바로 나왔다. 내가 손으로 직접 주는 츄르도 조금 망설이다가 금세 다가와 먹는 모습을 보였다. 고양이 카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고양이들이 처음에는 경계를 하지만 간식으로 유혹하면 바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기에 ‘고양이들은 이렇구나’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이 너무나도 짧았음을 우리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우리 집에 온 둘째 날의 티봉



카레의 이동장을 거실에 두고 이동장 문을 열어 주었지만, 카레는 이동장 안에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츄르도 소용이 없었다. 보호소에서 출발할 때 넣어둔 사료와 간식도 이동장 안에 있었지만 입에도 아예 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왠지 쉽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묘한 긴장감까지 돌기 시작했다. 새로운 공간도 공간이지만, 카레가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를 너무 무서워하는 상태라 우리가 있는 동안은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첫날의 카레. 츄르도 거부한 채 덜덜 떨고 있다



티봉이나 홍삼이를 생각했던 우리는 집안 곳곳에 카레가 사용할 물건들을 미리 배치해 두었다.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일단 카레가 진정할 수 있도록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 줘야 했다. 우리는 카레의 물건들을 다시 모아 내가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 작은 방으로 옮겼다. 물과 사료도 넉넉히 담아주고, 모래를 가득 채운 화장실도 한쪽에 잘 배치해준 후 카레의 이동장을 방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방문을 닫은 채로 있으면 카레의 모습을 아예 보지 못하는 거였다. 카레가 이동장에서 나오는지 아닌지도 모르고 있기엔 너무 답답했다.



물품들을 한 방에 넣어주고 혼자만의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티봉이를 탁묘하는 몇 주 동안 외출을 많이 하지 않았는데, 한 번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집을 비워야 했다. 처음으로 길게 외출하는 게 걱정이 된 나는 밖에서도 티봉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알아보니 휴대폰 카메라를 사용해 실시간 CCTV를 설치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이 있었다. 덕분에 긴 외출도 큰 걱정 없이 다녀올 수 있었다. 갑자기 그 생각이 떠올라, 다시 방으로 들어가서 카레가 잘 보이는 각도로 카메라를 설치했다. 무료 어플이라 녹화는 되지 않고 실시간으로만 볼 수 있는 저화질 카메라였지만 이렇게라도 카레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밖이 조용해지자 얼마 후 카레는 이동장에서 천천히 나와 조금 두리번거리더니 장식장 아래의 구석으로 숨었다. 츄르를 짜 둔 그릇은 여전히 쳐다도 보지 않았다. 조심히 방으로 들어가 카레가 숨어 있는 구석으로 츄르 그릇을 밀어주었다. 문을 닫고 나와 조용히 있자 얼마 후 카레가 조심스럽게 츄르를 핥아먹는 모습이 보였다. 츄르라도 먹으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자세히 보면 장식장 아래에 숨어 있는 카레의 발이 보인다


우리 집은 빌라인데, 중간에 껴 있는 세대라 층간소음과 벽간 소음이 심했다. 특히나 카레가 있는 방은 아래, 위, 옆으로 다른 집들이 있어 소음이 더 자주 나곤 했다. 왠지 그 날 따라 옆 집과 윗 집에서 쿵쿵 대는 소리가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사방에서 소리들이 들려올 때마다 카레가 움찔 거리는 게 화면으로도 전달되었다. 우리가 없는 게 카레에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저녁은 외식을 했다. 밥을 먹는 동안 계속 휴대폰을 옆에 세워 두고 카레의 모습을 확인해 가며 밥을 먹었다. 하지만 카레는 우리가 집에 없는데도 구석에서 나오지 못하고 미동 하나 없이 떨고만 있었다. 너무나 안타까웠지만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밥도, 물도 먹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은 채 숨어만 있던 카레는 밤이 되자 구석에서 나와 베란다 창문을 보며 아주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사실 이동할 때도 아무 소리 없이 조용했다고 하길래 원래 안 우는 아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형제들과 떨어져 혼자 있는 밤이 너무나도 무서웠나 보다. 멀리서 목소리로 달래주어도, 고양이를 안정시켜 준다는 음악을 틀어 주어도 카레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배도 고프고 목도 마를 텐데, 베란다 창문과 방문을 쳐다보며 카레는 새벽 내내 엄마를 찾는 것 마냥 끊임없이 울기만 했다. 카레가 서럽게 형제들을 부르는 소리는 꼭 늑대 울음소리 같았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새벽 내내 들려오는 카레의 울음소리로 우리는 깊게 잠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까지도 역시나 화장실은 사용한 흔적이 없었고, 밥도 물도 그대로였다. 적응하기 힘들어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먹는 것, 싸는 것처럼 기본적인 생활이 안 될 줄은 몰랐던 우리는 속이 탔다. 잘 먹고 잘 싸기만 해도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입양 담당자분께 연락을 드려 카레 형제묘들의 소식을 물었다. 제일 먼저 입양을 갔던 봄이는 아직 사람을 피해 숨어있긴 하지만 첫날부터 밥도 물도 잘 먹고 화장실도 바로 갔다고 했다. 운다는 이야기도 없었다고 하셨다. 그 소식을 들으니 우려는 더 커졌다. 다른 아이들은 잘 지낸다고 하는데 카레는 왜 이렇게까지 힘들어할까? 카레가 생각보다 더 형제들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구나 싶어 마음이 짠했다.


원래는 카레가 있는 방에서 일을 했지만, 그래서는 도저히 카레가 긴장을 풀 수 없을 것 같았다. 당분간은 거실에서 일하기로 하고 작업실의 컴퓨터를 거실로 옮겼다. 어제부터 그대로인 사료를 버리고 새로운 사료로 갈아주었지만 카레는 여전히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틀 동안 카레가 먹은 건 츄르 2개가 다였다. 구석에서 버티고 있는 카레가 너무 불쌍했다. 카레를 위해 츄르와 사료를 각각 그릇에 담아 구석으로 다시 밀어주었다. 카메라로 확인해 보니 츄르는 조금씩 핥아먹었지만, 여전히 사료는 먹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다가 카레가 정말 아프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고양이들은 밥을 조금만 안 먹어도 위험할 수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밥을 안 먹는 상태가 지속되면 할 수 없이 병원에 데려가야 했다. 일단 고양이의 기호성이 좋기로 유명한 캔이나 간식, 사료들을 알아보고 당장 사 오기로 했다. 그렇게 남편과 카레의 상태에 대해 카톡으로 상의하고 있던 무렵, 갑자기 카레가 있던 방에서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와그작, 와그작…’ 카메라를 확인하니 카레가 드디어 밥을 조금씩 먹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카톡으로 내적 환호성을 질렀다.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이틀 만에 겨우 밥을 먹는 카레.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이틀 만에 밥을 먹은 카레는 몇 시간 후 물까지 마신 후, 화장실에서 감자를 생성해 냈다. 게다가 그다음 날에는 맛동산까지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할 수 있다는 게 이렇게나 기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렇게 고양이가 먹고 싸는 당연해 보였던 일들이 문제가 될 줄 몰랐던 우리는 조금 허탈했다. 우리가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건가? 다른 고양이들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는데. 그래도 잘 먹고 잘 싸니 현재로서는 이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가장 힘든 일은 지나갔다고. 이제부터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고.




유튜브에서도 카레와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카레의 현재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여기를 확인해보세요!

이전 09화 첫눈처럼 찾아와 준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