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녹아든 시간들
나는 음악에는 기억이 머문다고 믿는다.
한 곡의 전주가 흐르는 순간, 시간의 문이 스르르 열리고
그때 그 계절의 공기가 밀려온다.
마치 오래된 서랍을 열었을 때 쏟아지는 편지들처럼,
음악은 내게 잊고 있던 순간들을 돌려준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나는 아이들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음악이 내 옆을 걷는다.
걷고, 일할 때 귓가에 음악이 머물러 있다.
작은 강물이 모래를 적시듯, 선율은 조용히 내 귓가에 스며든다.
그렇게 음악은 내 일상의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특정한 시절에만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봄에 피는 벚꽃을 겨울에는 만날 수 없듯이, 그 시간이 아니면 스쳐 지나가버리는 인연들 말이다.
나에겐 '시절음악'이 있다. 나의 각 시절마다 떠오르는 음악이 있고,
그 음악들은 시간의 책갈피처럼 내 삶의 페이지를 표시해둔다.
노래 제목들을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그 곡이 흘러나오는 순간 나는 그때 그 시간으로 순간이동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듯, 기억의 문을 통과해 그 시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때도 지금도 나는 느린 템포의 음악에 마음을 기댄다는 것이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천천히 호흡하고 싶은 마음의 반영일까.
급류 같은 일상 속에서 잠시 노를 멈추고, 물결에 몸을 맡기듯 음악에 기대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청룡영화제 이후, 화사와 박정민이 회사 점심시간의 주요 화제로 떠올랐다.
두 사람이 그 노래에 온전히 몰입해서 펼쳐낸 퍼포먼스는 화면 너머 관객들까지
그 순간 속으로 끌어당겼다.
"박정민 보고 설레었다"며 영상을 다시 찾아봤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나도 열심히 사는 배우이자 출판사 대표라고만 생각했는데,
뮤직비디오에서도 온전히 몰입하는 모습에 새삼 감탄했다.
카페에 앉아 있는데 화사의 노래가 창밖 풍경처럼 흘러나온다.
가사를 한 줄 한 줄 따라가다 보니,
오늘은 헤어짐에 대한 생각이 물밑으로 떠올랐다.
노래 속 헤어짐은 쿨하고 담담하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고, 센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겉과 속 모두 정말로 괜찮은 걸까?
표면의 잔잔함 아래 어떤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아물었지만 여전히 선명한 헤어짐이 기억에 머문다.
그 계절, '김동률의 오래된 노래'가 그때 나를 지탱해주었다.
그 노래는 부서진 내 마음 옆에 조용히 앉아, 아무 말 없이 함께 있어주었다.
그 후로 내 이어폰에서 그 곡이 참 많이 흘러나왔다.
지금도 종종 듣는다.
아물었지만 여전히 선명한, 비 온 뒤 땅에 패인 자국처럼 남은 그런 흉터 같은 노래이다.
새로 나오는 음악들을 듣다 보면,
'노래에도 그 시절의 공기가 담긴다'는 생각이 더욱 확연해진다.
음악에는 그 시절의 빛깔이 있고, 시대의 결이 서려 있다.
나는 아쿠스틱한 음악에 마음이 간다.
기타의 현과 현을 오가는 섬세한 소리, 손끝이 줄을 스치는 그 작은 마찰음까지도
음악이 만든 절묘한 순간이라 생각한다.
피아노 코드가 물 흐르듯 흐르는 곡, 건반 위에서 춤추는 손가락의 여정이 들리는 노래가 좋다.
기승전결이 있는 노래가사, 한 편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노래가 좋다.
'별보러갈래' 처럼 옆에서 속삭이듯 말을 건네며 시작하는 곡도 좋다.
마치 오랜 친구가 오랜만에 전화 걸어 이야기를 꺼내듯 다가온다.
내 마음을 전하거나 표현할 때, 음악만큼 좋은 게 있을까? 생각해본다.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감정들이 선율 속에 녹아든다.
그러니 슬플 때나 기쁠 때, 혼란스러울 때나 평온할 때,
언제나 음악은 내 곁을 지킨다.
살면서 각자 자신만의 플레이리스트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의 목록에는 락음악이 가득할 테고,
어떤 이의 목록에는 클래식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나의 목록에는 느린 템포의 노래들이,
마치 기억의 숲을 거니는 발걸음처럼 차분히 늘어서 있다.
앞으로 나의 삶에서 어떤 곡들이 그 목록에 추가될지, 문득 궁금해진다.
어떤 계절의 어떤 감정이 다음 트랙으로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이별이, 어떤 만남이, 어떤 깨달음이 새로운 선율로 내게 다가올까.
음악은 계속해서 흐르고, 나는 그 물결 위에 머문다.
그대의 시절음악은 무엇인가요?
어떤 노래가 당신의 기억의 숲에 자라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