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탱하는 힘, 그 힘을 만드는 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고

by Sailing

나를 지탱하는 힘, 그 힘을 만들어 내는 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내가 좋아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좋아서 거리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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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14일에 쓴 글로 3년 반 후에 발행되었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몇 권 정도는 읽어야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던 대학 시절, 꽤 여러 권의 하루키 소설을 읽었지만 그가 마라톤을 하는 러너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더군다나 재즈 카페와 식당을 운영했던 과거가 있다는 사실까지도.

나의 개인적 태도 중에는 작가 개인의 삶과 작품을 철저히 분리해서 받아들이는 점이 있다. 작품에 매료되었지만 개인의 삶이 엄격한 윤리적 잣대에 못 미치기 때문에 작품까지 부정하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 윤리적 잣대의 기준이 낮을 뿐이지 극악무도한 삶을 살아온 작자의 작품을 보면서 역겨운 괴리를 경험하는 것은 앞으로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간 세상에서 응당 삶과 작품이 모두 부정당할 만한 도덕적 기준으로 바라봤을 때 종종 불거지는 작가의 삶과 작품성의 괴리는 그저 개인사에 불과한 정도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적어도 나의 데이터 속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아무튼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라고 말해 왔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개인적 삶을 들여다볼 기회는 없었기도 했거니와 한 개인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사실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지난 십 수년 스스로 만들어 온 길고 짧았던 쳇바퀴 속에서 대학 시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교양과 여유, 그리고 그로 인한 정신과 마음의 풍류를 완전히 잊고 살아온 생활양식도 한몫을 하였다.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나날이 숙성만 시키고 있을 때, 우연히 유튜브 한 영상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다. 달리기를 통해 하루키가 개인의 삶과 일상을 마주하는 태도,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짐작하게 하는 제목이었다.

이 책은 생각이 정리되면, 그리고 내가 의식적으로 멈춘 그 시간에 읽고 싶었고 마지막 퇴사를 실행한 이틀 후 주문하여 삼일 째부터 사일 재까지 읽어냈다.


어느 날 소설을 쓰고 싶다 그리고 쓸 수 있겠다 생각을 가진 하루키는 원래 하던 일을 멈추고 소설만 쓰기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글을 써온 기간도 있었으니 소설'만' 쓰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아내와 함께 식당과 재즈 카페를 운영하려고 할 때도 주변인 중 다수는 내성적인 네가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일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태도와 속도로 일을 대했고, 꽤 잘되는 가게의 사장님으로의 생활을 지속했다. 이후 사반세기 수많은 소설과 에세이 번역을 거쳐온 그를 생각해 보면 그 시절 하루키의 내면에서 들끓는 생각들과 그것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충만했을까 상상해 보게 된다. 아닌가, 오히려 하루키라면 그때의 생활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꾸려나가는 것에 그저 집중했을까. 아무튼 언젠가부터 그는 일이 끝난 후 몇 시간을 글을 쓰는 데 사용했고, 가게가 한창 잘 유지될 때 소설만 쓰기 시작하기로 했다.


어릴 때의 나는 글을 곧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다. 원치 않았던 독후감 제출, 논술 대회 등에서 의도치 않게 상을 받기도 했지만 글쓰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글쓰기는 늘 하기 싫은 숙제나 귀찮은 방청소처럼 해치워야 하는 것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내 생각을 표출하는 도구로서 생각을 전환할 만큼 진지하지 못했으리라.

아마도 내가 오롯이 나의 의지로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 처음으로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 이곳저곳 예상치 못하게 부딪혀 온 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취방 바닥에 엎드려 몇 자 적어 내려갔던 때인 듯하다. 아, 조금 더 거슬러 가니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사교 목적으로 글짓기를 돌려가며 한 적이 있었구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업무에 필요한 비즈니스성 글 말고는 글을 몇 자나 써봤을까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왜 나는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덮는 순간 바로 쓰기 시작했을까.


하루키는 소설을 쓰는 것은 정신적 노동 이상의 육체적 노동 강도가 높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소설을 쓰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필연적으로 선택한 것은 운동을 체화하는 것이었고, 그중에서도 혼자 자신의 페이스를 만들어 끝까지 달려 나가야 도착 지점을 만날 수 있는 마라톤 달리기를 선택하였다. 단기 스퍼트로 타인과 경쟁하는 단거리보다 자신을 들여다보며 다독이고 가끔은 실패하며 자신만의 패턴에 이르러야 비로소 지속할 수 있는 그 지난한 마라톤을 겪어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에 더 알맞은 근육을 길러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내내 나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는 생소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줄곧 정해져 있는 생활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 그 두 선택지만 주어졌던 나에게 미술대학 1학년부터 시작된 자신을 발견하고 내면을 밖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을 요구받는 것은 생각보다 쑥스러웠다. 분명 나의 기질과 특별히 잘 발달된 근육의 존재를 보았지만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기 어려웠다. 빠르게 세상 속에 젖어 들어 즉시적인 보상을 받는다면 그 존재를 계속 가리고 있어도 될 것 같았다. 졸업 후 나는 그 뒤에 철저히 숨고, 나의 기질 중 훈련으로 학습 가능한,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적인 보상이 주어지는 근육을 발달시키는 데에 초점을 두고 달려왔다. 그 사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나만의 근육은 점점 퇴화되었고, 새로운 근육들은 나를 위안했다. 그러나 늘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나의 일부로 만들 수 없음을 나는 인정했다.


하루키는 자신의 기질과 소설가로서의 태도,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러너가 되었다.

사반세기 동안 글을 쓰고 달리는 것. 꾸준히 성장하지만 어느 순간 임계점에 도달하고 퇴화할 수밖에 없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만 지속해 갈 수 있는 힘, 그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은 결국 자신임을 재차 여러 번의 마라톤 대회와 준비 과정 트라이애슬론으로 전환한 스토리를 통해 말하고 있다.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속이지 않으며 현상을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고 이어나가는 태도. 하루키가 소설을 쓰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를 통해 언젠가부터는 자신을 러너라고 소개할 수 있게 되었음일 테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늘 자신을 살아감에 있다.


졸업 이후, 나는 13년간 다수의 이직을 했고, 가끔 조금 다른 일을 시도했다. 다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성공적인 방향이라 말하는 선택지를 나도 선택한 것이었고, 다수는 미지의 시간 속에 나를 그냥 던져보았다. 내가 원했건 원치 않았건 그렇게 스스로 길들여가는 과정 속에서 더 이상 경제적인 불안에 완전히 떨지만은 않을 정도. 딱 그 마나 한 성장을 이루어내기도 했고, 꽤 그럴듯하게 보이는 커리어 패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그토록 오랜 시간 찾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는지, 왜 갑자기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것이 가장 최선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직도 명료하지가 않다. 하지만 하루키 개인의 이야기를 마주할 수 있음으로 하여 나는 나에게 다시 물을 수 있게 되었다.


너를 지탱하는 힘이 무엇인지, 그 힘을 어떻게 만들어 내고 유지해 갈 것인지.

마치 내 속에 아무것도 쌓여있지 않은 것처럼, 아무 경험도 만나지 않은 상태인 나인 양 몇 권의 책을 흡수하고 일상을 소소하게 채울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다.

아마도 이 시간들이 지난 후에는 몇 가지 씨앗들이 흙 위로 얼굴을 빼꼼 보여주지 않을까.

그리고 하루키처럼 다짐해 본다. 불현듯 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올 때, 나는 그것을 지탱하는 힘을 꼭 함께 만들어 내겠다고.. 그리고 하루키가 스스로 러너라고 부르고, 타인에게 불렸던 것처럼 나도 그러한 지속성을 내 일부로, 정체성으로 뚜벅뚜벅. 케세라세라 (Que será, ser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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