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하지 않기

초보이민자의 멘탈관리

by 세일러킴

뚜벅이족 우리 가족은 주말마다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에 간다. 코스는 항상 같다.

스탠리 파크(Stanley Park) 산책 → 세컨드 비치(second beach)에서 멍 때리기 → 잉글리 베이(English Bay) 화장실 들르기 → 다운타운 중심지 랍슨 거리(Robson st.)에 있는 한인 마트까지 걸어가기 → 일주일 식재료 구매 후 귀가


스탠리 파크와 세컨드 비치는 연결되어있다.

코로나 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여전하지만, 장보기를 핑계로 콧바람을 쐬는 다운타운 나들이는 기분전환이 된다.

지난 주말에도 여느 때처럼 버스에 탑승했다. 공용버스는 ‘seat closed' 스티커를 철거하였지만, 승객들은 알아서 떨어져 앉는 분위기다. 기온이 높아져 거북해도 우리 가족은 실내에서 반드시 마스크를 쓴다. 토론토는 7일부터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시행하였는데 밴쿠버는 아직 소식이 없다. 버스 안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과 쓰지 않은 사람 비율이 반반쯤 되는 것 같다.


토요일 오후, 버스는 붐볐다. 빈자리가 있어서 나와 아이들은 앉고, 남편은 옆에 섰다. 착석하자마자 맞은편 백인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할아버지는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눈동자를 돌리려는데, 할아버지가 오만상을 찡그리며 왼쪽 주먹을 흔들었다. 다행히 곁에 서 있던 남편도,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도, 그 장면을 못 본 것 같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인종차별이구나 싶었다. 밴쿠버 온라인 한인 카페에는 코로나 19 이후 불쾌한 경험을 당했다는 게시물이 제법 올라온다. 글로 읽었을 때는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훌훌 털어야지 싶었는데, 막상 당해보니 가슴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누가 봐도 정신이 온전치 않은 할아버지였다. 인종차별은 개인의 인성문제고, 어디나 이상한 사람은 있기 마련이다. 그 할아버지가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마음이 아픈 환자의 돌출 행동으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다. 머리로는 정리가 되었는데, 마음이 따르지 못했다. 돌덩이처럼 던져진 해프닝이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최근, 국경 폐쇄 연장 결정으로 여전히 비자 문제가 표류 중이어서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했던 터였다. 차가 없어서 이런 서러움까지 겪었다는 근거 없는 심통은, 캐나다로부터 거부당한 것 같은 망상으로 확장되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남편은 내 눈치를 보다가 덩달아 기분이 가라앉았고, 우리 가족의 주말 외출은 내내 무거웠다.


김하나 작가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에 김이나 작사가가 출연했다. 김이나 작사가는 연예인 후배들이 악플로 인한 고통을 토로할 때 “안 보면 없는 세상이니 상처 받지 말자”며 다독였다고 한다. 방송 출연이 늘고 대중들의 관심을 받게 되면서 김이나 작사가는 어느새 악플을 읽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김이나 작사가는 “동생들에게는 어른스럽게 조언했으면서, 정작 나에게 닥치니 상처를 받았다”면서 “대충 미움받고 확실하게 사랑받을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현실은 풍경화가 아니다. 아늑한 카페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바라보는 것과 흠뻑 젖어 폭우를 뚫는 것은 다르다.

축축한 양말을 신고 유치원 재롱잔치 무대에 오른 기억이 있다. 대기실에 누군가 물을 쏟았는데, 그걸 모르고 바닥 물을 밟은 것이다. 겨울이었다. 신고 있던 두꺼운 양말이 물을 흥건하게 빨아들였다. 6살은 찜찜한 기분을 견딜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양말을 바꿔 달라고 칭얼거렸지만, 공연 시간이 임박하였기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마음껏 뽐내며 춤추고 싶었지만, 물먹은 양말 때문에 울상만 짓다 내려왔다.


어른이 ‘초조함을 삼가고, 요동치는 마음을 인식하며, 지루하고 불편하고 불유쾌한 것들을 피하지 않고 버티는 정신상태’를 의미한다면, 나는 어른이 아니다.

일본 승려인 구사나기 류슌은 이를 ‘반응하지 않기’라고 했다. ‘반응하지 않기’는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거나, 없는 척 최면을 거는 것과 다르다. 이해되지 않는 타인의 말과 행동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거나 예상하지 못한 불행이 닥쳤을 때, 고민과 불안을 부풀리는 헛된 반응을 차단하는 것이다.

화가 나거나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 감정은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무리하게 참으면 화병 난다. 어떤 고통은 내면의 오래된 생채기를 치료해준다. 한국 불교를 전 세계에 알렸던 숭산 대선사는 이것을 ‘깨끗한 고통’이라고 하였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였다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감정을 행동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된다. 쉽지 않다. 마음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외부 상황에 흔들리고, 반응한다. 여기서의 반응은 마음속 움직임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어리석은 행동 때문에 피해를 입고 발끈할 수 있다. 별일 아니라며 억지로 자신을 속이진 말자. 괜찮지 않은 것은, 괜찮지 않다. 그 순간, 욕지기가 올라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연스레 흘려보내는 것이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은 언제나 타인과 나를 이간질시킬 준비가 되어 있다. 이간질에 넘어가지만 않으면 된다. 물론 연습을 해야 한다. 종교생활, 영성수련, 마음훈련, 예술활동... 각자에게 이로운 방식을 취하면 된다. ‘아버지 하나님’을 불러도 되고, ‘관세음보살’을 외워도 된다.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를 반복할 수도 있다. 나는 욱 할 때마다 온갖 주문(?)을 동원한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를 외치다가, ‘나무아미타불’도 읊조린다. ‘반응하지 말자’며 중얼거리기도 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움직이지 않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로 그것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라고 부른다. 우리의 본성 혹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란 뜻이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면 아무리 아름다운 그림이나 풍경이 나타난다 해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법이다.


- 선의 나침반, 숭산스님 지음, 현각 스님 엮음 -



이제 막 이방인으로서 첫발을 뗐다. 앞으로 무수한 희한한 일들을 겪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심리적 타격을 입을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의 말처럼 ‘털썩 주저앉아 내 삶을 먹먹하게 돌아봐야 하는 때라고 알려주는 신호와 같은 감정’들이 리얼월드로 끌고 갈 것이다.


OK. 내 인생에 코딱지만큼의 영향도 없는 ‘지나가는 행인 1’의 돌발행동에도 크게 동요하는 멘탈 수준을 확인했다.

마음이 아픈 건 뇌의 작동이다. 물리적 충격이 아닌 추상적인 고통은 돌이킬 수 있다.

아직은 ‘반응하지 않기’ 초급 레벨이지만, 여기저기에서 날아오는 잽을 힘 빼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마음의 맷집도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가급적이면 좀 살살해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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