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밴쿠버에서 처음 사귄 친구인 현주 씨(가명)의 집에 초대받았다. 현주 씨는 지난 글에 등장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넨 동갑내기 학부모다. 코튼 우드 알레르기로 집에 머물러 있는 동안 시간은 알아서 흘러갔고, 어느덧 6월이 되었다. 더 이상 고립되면 안 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바깥세상과 접촉하기 위해 현주 씨에게 연락을 했더니, 고맙게도 우리 가족을 초청해주었다.
가깝지 않은 누군가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어렵다. 교류에도 완급조절이 있어야 하지 않나, 민폐를 끼치면 뒷수습을 어떻게 해야 하나 ‘사서 고민’을 시작했다. 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관계의 균형을 잡고 싶다면 일단 부딪혀 봐야 한다. 그래야 해도 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을 배운다.
밴쿠버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현주 씨는 바비큐 준비가 한창이었다. 남편들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테라스로 가서 고기를 굽고, 현주 씨와 나는 상을 차렸다. 우려가 무색할 만큼 자연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식사시간이었다. 우리보다 일 년 먼저 밴쿠버에 자리를 잡은 현주 씨 부부는 슬기로운 이민생활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목조로 된 2층 아파트의 1층에 위치한 현주 씨 집은 네 식구가 살기에 충분히 넉넉하고 쾌적했다. 전 편에서 아파트 형식의 공동주택을 콘도라고 부른다고 한 바 있다. 밴쿠버 이민 선배님이 댓글로 콘도와 아파트를 구별해 주셨는데, 아파트는 임대 전문 회사 소유의 공동주택으로 대게 저층 건물이라고 한다. 설명으로 들었을 때는 콘도와 아파트의 차이가 감이 안 왔는데, 생활하는 모습을 직접 보니 느낌이 또 달랐다.
현주 씨네 아파트는 지어진 지 꽤 오래되었지만 내부를 리모델링했나 싶을 정도로 회사가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입주민이 이사 가는 경우가 드물어 집 구하기 어렵다고 한다. 캐나다는 렌트비를 연 2.6% 이상 인상할 수 없고, 회사 소유다 보니 팔릴 염려도 없어 임차인만 원하면 쭉 한 집에 지낼 수 있다.
이사와 임대료 걱정 없는 집이라니, 귀가 솔깃했다. 밴쿠버의 모든 아파트가 이렇게 잘 관리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주 씨는 당분간 이사 계획이 없을 정도로 만족도가 높았다.
클리브랜드 댐 파크
카메라에 담기지 않을 만큼 댐은 컸다. 점심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현주 씨는 클리브랜드 댐(Cleveland Dam) 산책을 제안했다.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클리브랜드 댐은 밴쿠버의 관광 명소 중 하나다. 현주 씨는 우리 가족이 클리브랜드 댐을 가본 적 없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밴쿠버에 와서 내내 집에만 있었던 우리가 안타까웠는지, 현주 씨는 자신의 8인용 SUV에 우리 가족을 태웠다.
클리브랜드 댐은 듣던 것보다 웅장했다. 깊은 골짜기는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살을 제대로 마주 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했다. 처음 느낀 고소공포증에 서 있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람들이 왜 굳이 폭포를 보러 가는지 의아했는데, 이 정도 높이의 물줄기에도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보니 납득이 갔다. ‘언젠가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봐야겠구나’라고 의식이 흘러갔다.
클리브랜드 댐에서 집주인 제인을 만났다. 어디서 많이 보던 멍멍이들이다 싶었는데, 제인네 반려견들이었다. 제인은 오후마다 자동차에 송아지만 한 멍멍이 세 마리를 태우고 나가는데, 행선지가 클리브랜드 댐 파크였나 보다. 여태 이렇게 가까운 동네 공원도 안가보고 뭘 한 걸까 갑자기 심통이 났다.
버나비 코스트코 며칠 후, 현주 씨에게 톡이 왔다. 버나비 코스트코로 장 보러 갈 건데 동행하겠냐는 제의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현주 씨를 따라갔다.
코스트코는 컸다. 이것이 대륙의 사이즈인가 감탄하고 있는데, 이 정도 매장은 보통이고 한인들이 많이 사는 코퀴틀람 포코점은 훨씬 규모가 있다고 현주 씨가 설명했다.
현주 씨가 나를 코스트코에 데려온 이유가 있었다. 캐나다는 일반가정에서 수돗물만 부으면 정수되는 브리타(Brita)를 사용한다. 나는 그동안 물을 끓여 먹었는데 현주 씨네 집에서 브리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골 쥐처럼 살림 하나하나 신기해하는 나를 보며, 현주 씨는 아마도 이 가여운 시골 쥐를 개화시켜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코스트코에서 지름신의 축복을 만끽했다. 브리타를 비롯하여 캐나다의 마약 과자(?)라고 불리는 옥수수 스낵, 감기 예방용 프로폴리스, 위염에 좋다는 시나몬 허니 등 캐나다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살짝 맛볼 수 있었다.
버나비 코스트코에서 신세계를 영접하고 나니, 얼마 전부터 부글부글했던 심통이 팔팔 끓어올랐다. 자동차만 있다면 코스트코로 장도 보러 가고, 클리브랜드 댐은 물론 밴쿠버에 온갖 좋은 곳으로 나들이 갈 텐데... 현주 씨네처럼 깔끔하고 넓은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삶의 질이 확 올라갈 텐데... 욕망의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캐나다 필수템 브리타 정수기
먹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는 마성의 옥수수 과자
위염에 좋다고 알려진 시나몬 허니. 관광객들에게 인기 좋은 제품이다.
당신들은 자녀를 가장 사랑한다 말하지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고 있다.
- 2018년 12월, 제24차 유엔 기후변화 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그레타 툰베리 연설 -
그레타 툰베리 (사진출처 연합뉴스)
외적 조건보다 중요한 것은 내면의 평화라는 것을 안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감각은 힘이 세다. 인간은 외부 자극에 쉽게 영향을 받고, 특히 감각기 중에서도 시각정보의 효과는 크다.
불평등, 빈곤, 환경재앙을 낳은 물질만능주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큰소리쳤다. 녹색살림을 실천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분수에 맞게 소비하겠다던 다짐은 이 정도 유혹에 증발해 버렸다. 자본주의를 맛보자마자 무릎을 꿇었다.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간극이 실감 난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잠시라도 소비를 멈춰야 한다는 이성을 따르기에, 나의 소비 수준이 곧 나의 가치라는 착각에서 벗어나기에, 밴쿠버는 너무 매력적인 도시다. ‘지구야 미안해’라며 잠시 죄책감을 느끼다가도, 그림 같은 집에 살면서 근사한 차를 타고 캐나다의 문화와 자연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부럽다.
바꿀 수 없다면 당신이 지닌 단점과 함께 자신을 수용하라.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고 배워나간다면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면서도 당신의 약점과 결점들을 줄여나갈 수 있다.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이 자신에게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머리를 높이 들어라. 당신도 인류의 한 구성원이다. 당신에게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운명을 어느 정도까지 실현할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지능, 자원을 갖고 있다는 긍지를 가져라.
- <왜 나는 계속 남과 비교하는 걸까>, 폴 호크 저 -
언젠가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편의를 위해 자동차를 구입하고 싶다. 그러고 나면 얼마간 만족하겠지만 이내 더 좋은 집과 멋진 차가 눈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한심해 하진 않으려 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구 또한 '있는 그대로의 나'이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흔들리다 보면 분별 있는 생각과 욕망의 열기가 조화로울 날도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