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

Black lives matter

by 세일러킴

주말에 온 가족이 다운타운 나들이를 갔다. 회사 일로 토요일 오후에 잠깐 사무실을 가야 하는 남편의 제안이었다. 밴쿠버에 와서 석 달이 넘게 동네 밖을 떠나본 적 없는 딸들이 안타까웠나 보다. 토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비가 왔다. 끄물끄물한 날씨 탓인지 아이들은 시큰둥하게 나갈 준비를 했다. 외출이 귀찮다는 애들을 억지로 다운타운 행 버스에 태우자 언제 비가 왔나 싶게 쨍한 해가 떴다. 코로나 19로 인한 봉쇄조치가 완화되어서인지 다운타운은 활기찼다. 내내 한적한 주택가만 왔다 갔다 했던 아이들은 이제야 캐나다에 온 것 같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관광 명소, 개스타운 증기시계를 찍는 둘째


그때, 한 노숙인이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Do you have any changes, sir?”


남편은 정중히 동전이 없노라고 대답을 했지만, 그는 계속 말을 건넸다. 다급하게 아이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아저씨랑 아빠가 무슨 얘기 중이냐고 묻는 딸들 손을 우악스럽게 잡고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왜 저런 사람과 말을 섞고 있냐고 채근 하자, 남편은 태평스레 답했다.


“출근길에 매일 만나는 아저씨야.”




Black lives matter


지난 5일 오후 4시 밴쿠버 다운타운에서는 경찰 공권력 남용에 의해 비참하게 숨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에 대한 두 번째 추모집회가 열렸다.


6월 5일 오후 밴쿠버 다운타운에서 열린 두 번째 추모집회 (사진출처 밴쿠버 조선일보)


조지 플로이드는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미네마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 세상을 떠난 흑인이다. 조지 플로이드는 한 상점에서 물건 값으로 20달러짜리 지폐를 내미는데, 주인은 위조지폐로 의심하여 경찰에 신고한다.(결론적으로 지폐는 진짜였다.) 조지는 출동한 경찰 데릭 쇼빈에게 ‘sir’라는 호칭을 쓰며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만, 데릭은 조지를 바닥에 쓰러뜨리고 무릎으로 목을 짓누른다. 놀란 주변 사람들이 데릭을 말려도 소용이 없었고, 조지는 “I can’t breathe(숨을 쉴 수가 없어요.)"라고 호소하다가 사망한다.

미네마폴리스 경찰이 조지의 죽음을 의료사고라고 발표하자, 성난 시민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경찰이 평화로운 시위대를 강경 진압하자 시위대는 흥분하고 언론에서는 백인 경찰에 의한 비무장 흑인의 억울한 죽음 대신 시위대의 과격한 폭력 행동을 부각한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이 시위대를 '폭력배'라고 규정하고 군 투입을 운운하며 강경한 입장을 밝히자 저항은 더욱 격렬해진다.

시위는 약탈과 폭동으로 번져 지난 1992년 LA 인종 갈등 사태처럼 한인교포들은 큰 타격을 입고, 당시 흑백 갈등의 방향이 엉뚱하게 한인들에게 지목되면서 교포들이 겪어야 했던 비극이 이번에도 반복된다.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면서 한인들의 피해 소식을 듣게 되니 남일 같지 않다. 한인들도 미국 사회의 또 다른 소수계인데, 약자가 다른 약자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불행한 역사는 되풀이되면 안 된다.

다행히 한때 방화와 약탈로 얼룩졌던 시위는 가족들이 함께 하는 평화 행진으로 변하고 있고, 미국의 한인들도 같은 소수자로서 경찰 폭력과 인종차별 철폐를 촉구하는 평화 시위에 동참하는 등 연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이번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데, 지난 5일에는 밴쿠버, 오타와, 토론토 등 캐나다의 주요 도시에서도 진행되었다. 특히, 오타와 집회에서는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깜짝 등장해 인종차별과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한 반대를 의미하는 '무릎 꿇기'를 세 차례 반복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손에는 'Black lives matter(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든 트뤼도 총리는 이날 현장에서 별도의 발언을 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2일 기자회견에서 미국 시위대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강경대응 발언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헐' 한숨을 쉬며 21초 동안 말문을 열지 못한 바 있다. 이후 트뤼도 총리는 "우리는 미국의 상황을 두려움과 실망 속에서 지켜보고 있다"라고 발언했다.


6월 5일 오타와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참석한 트뤼도 캐나다 총리(사진출처 로이터통신 연합뉴스)


숨을 쉴 수 없다고,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조지 플로이드의 외침을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흑인들은 뉴욕시장 같은 사회지도층이나 할리우드 스타라 하더라도 자녀들이 십 대가 되면 “갑자기 움직이지 말고, 답변은 정확하게 하며, 말끝에는 반드시 ’sir‘를 붙여 경관을 존중하는 뜻을 나타내며, 만일 수갑을 채우면 부모가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경찰 조치에 따르라”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누구는 모든 흑인이 이런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닌데 지나친 일반화 아니냐고 입을 삐죽거릴 게다. 하지만 상대가 자신의 '피부색만 보고 지레 의심하는'상황 때문에 모멸감을 느끼는 사람의 절대다수가 흑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서 끄집어내야 할 일반화는 '백인 모두가 차별하는 건 아니다'는 폭력적 기만이 아니라 '흑인 모두가 차별의 대상일 수 있다'는 상식적 추론이다.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저 -


인간은 자연스럽게 접해온 익숙한 세계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최고라고 착각한다. 한 걸음만 떨어져서 보면 이해되지 않은 생각과 행동도 ‘문화’라는 오래된 습관에 길들여지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밴쿠버 온라인 한인 카페에는 가끔 특정 문화권 사람들의 눈살 찌푸리는 모습에 대한 성토 글이 올라온다. 해당 문화권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양해될 수 있지만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용인될 수 없는 규범, 관습, 풍속 등에 대하여 얼마든지 의견을 나눌 수 있다고 본다. 캐나다가 ‘문화의 모자이크’ 국가라지만 공기처럼 떠도는 차별은 실재하고, 코로나 19 이후 밴쿠버에도 동양인(특히 여성)에 대한 혐오 범죄가 증가하고 있기에, 척하면 척 통하는 동포들과 속풀이 수다를 떨고 싶은 심정도 수긍이 된다.


‘메타인지 학습법’의 저자인 콜롬비아대학 심리학과 리타 손 교수에 따르면 고정관념을 가진다는 것은 특정 유형에 관한 범주를 만든다는 말과 같다. 뇌의 자동처리 방식(대상의 정보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인 범주화 전략은 주어지는 정보가 충분하지 않을 경우엔 효율적이지만, 특정 집단이나 단체와 관련될 경우 '저 범주에 속한 사람은 똑같이 저럴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 선입견을 낳는다.

문제는 선입견인 줄도 모르고 특정 집단에 속한 개인을 ‘응당히 그러할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되는 것. 낯선 환경에서 마주친 상대방이 적인지 아군인지 찰나적으로 식별하기 위해 뇌가 범주화 전략을 활용하는 것은 생존에 유용하다. 그렇지만 개별적 존재인 개인에 대하여 '어떠한 범주에 속해 있다'는 명목만으로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고 확정판결을 내려 버리면 ‘편견’을 갖고, ‘차별’하고도 괜찮아지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존귀하고, 인종, 성별, 종교, 나이, 학력, 직업, 외모, 피부색, 신체조건, 출신 국가,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소득 수준, 사는 지역, 혼인 유무, 사회적 신분 등 모든 영역에 있어서 그 어떤 개인에게든 합리적인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은 민주사회 시민으로서 의무를 저버린 몰상식한 행위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자주 성급하고 그릇된 결론을 내린다.


인류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타협 불가 키워드 두 개에 합의했다. 폭력과 이의 근원이 되는 차별은 더 이상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식의 논의를 허용하지 않는다. 특히 홀로코스트를 경험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어디까지 대할 수 있는지 인류는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폭력과 차별은 공적 엄벌의 대상이지 사적 이해의 영역이 아니다. 차별받지 않고 그래서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인간이 그나마 존엄해진다는 사실은 인류를 이롭게 한 대표적인 일방통행의 결과다. 이 명제만큼은 노예처럼 수동적으로 받아들여도 된다. 그럴수록 실제 노예는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다른 생각을 금지시키니 '다양성'이라는 개념에 어긋난 것 아니냐고 따져볼 수도 있겠지만 혼란이 온다면 이것 하나만 명심하면 된다. 다양성은 '절대 악'이 저지르는 폭력에 맞서기 위한 개념이지 악을 악이라고 할 때 적용될 수 없다. 무지를 옹호하는 다양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저 -


경기도의 한 도시에 살던 시절, 아파트 입구에 서있던 공중전화를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휴대폰의 대중화로 공중전화가 사라지면서, 내가 살던 아파트 입구에 공중전화박스가 설치되어있다는 것이 인근에 거주하던 외국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알려졌던 것 같다. 그들은 대게 일과가 끝난 후 공중전화박스로 몰려왔는데, 저녁 어스름 무렵 피부색이 검은 외국인 남성 무리가 지나가면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곤 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는 혹시라도 저들 중에 누군가 딸들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은근히 공중전화박스가 철거되었으면 했다. 공중전화를 방문한 외국인 노동자 중 말썽을 일으킨 사례가 전무하다는 객관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겁이 났다. 공중전화를 찾은 외국인들이 람보르기니 타고 온 세련된 백인들이었더라도 두려웠을까? 오히려 힙한 백인들도 찾아오는 핫플레이스에 살고 있다며 으쓱했으리라.

만인이 평등하기를 염원하는 나의 진짜 속마음은 창피하게도 그랬다. 소수자의 인권을 연구하는 김지혜 교수의 표현대로 나는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다운타운 나들이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 마리화나 냄새가 진동하는 First nation(선주민) 여성이 탑승했다.

미국 흑인들이 인종차별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저학력과 빈곤에 노출되는 것과 캐나다의 First nation들이 약물에 취해 사는 것은 다르지 않다. First nation에 대한 차별은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자 하는 캐나다의 그늘이다.

최근 BC주에서는 약물중독 상태였던 First nation이 체포 과정에서 사망하였고, 지난 4일 New Brunswick주에서 First nation 여성이 경찰 총에 숨지는 등 공권력에 의한 First nation의 사망사건이 종종 발생하고 있다.

버스에 탄 First nation 여성은 들고 있던 종이백에서 햄버거를 꺼냈다. 햄버거를 잡은 그녀의 손과 손톱이 검게 얼룩져있다. 순간 불손한 감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함부로 타인을 재단하는 나쁜 버릇이 발동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절의 의병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조선의 노비 출신인 미국 해병대 장교 유진은 의병 활동을 하고 있는 사대부 여성 고애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구하고자 하는 조선에는 누가 사는 것이오?
백정은 살 수 있소? 노비는 살 수 있소?


내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연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흑인은 있는 걸까? 외국인 노동자는? 노숙자는? 빈곤한 First nation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여전히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이런 자신을 끝까지 부끄러워하며, ‘편견’과 ‘차별’이라는 ‘비이성적’이고 ‘반인륜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인간은 예외 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진리를 무겁게 받아들여 ‘연대’와 ‘공감’의 삶으로 향하길 소망한다.


둘째가 그린 인종차별 반대 그림


*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인종차별 반대 시위, 캐나다 선주민 사망 관련 내용은 밴쿠버 조선일보와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를 발췌,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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