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계신 부모님 생각
한국에 계신 친정아버지가 폐렴에 걸리셨다.
평생 병원 문턱을 밟은 적 없던 아버지는 5년 전 대장암 판정을 받은 후 건강이 급속히 나빠졌다. 노년기를 항암치료로 시작했던 아버지는 또래 어르신들에 비해 많이 늙으셨다. 한 때는 175cm 키에 몸무게 70kg의 건장한 체격이셨지만, 이제는 45kg에 불과하다. 친구 분들 중에는 여전히 현역으로 일하는 분들도 계신데, 몸에 붙은 살이 없어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셨다.
엄마는 긴 병간호 끝에 마음을 잃으셨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큰 병을 감당하지 못한 아버지는 몸과 마음의 고통을 아내에게만 호소했다. 아버지의 암은 완치됐지만, 엄마의 몸과 마음은 지쳤고, 100세 시대에 노인 축에도 못 끼는 60대 후반이지만 호호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캐나다 이주를 앞두고 병약한 부모님을 두고 떠나는 것이 옳은가 고민이 컸다. 부모님께서는 사위에게 주어진 기회를 진심으로 기뻐하셨고, 남동생이 부모님의 보호자 역할을 수행하겠다며 새 출발을 응원해준 덕분에 무거운 마음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남편이 먼저 캐나다로 떠나고, 남은 날들 동안 최대한 부모님과 좋은 추억을 만들기로 다짐했다.
가족 중 한 명이 내게 감기몸살로 여러 증상들을 호소하면 나는 "별것 아니다. 괜찮다. 가능하면 그냥 버텨라"하고 얘기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들은 내 반응에 몹시 서운해했다.
당시 나는 서운해하는 상대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상대의 입장은 좀 다르다. 죽을 만큼 큰 병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아픈 몸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져주길 원한다.
그 기저에는 무엇보다 자신의 아픈 몸을 아무것도 아닌 듯이 가볍게 여기지 않길 바라는 속마음이 있다.
자신의 고통을 진지하게 대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다.
- <당신이 옳다>, 정혜신 저-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다. 타인이 고통과 상처, 갈등을 이야기할 때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데, 나는 성급하게 결론을 내고 정답을 채근하며 ‘바른말’로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공감이란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을 포개는 일인데, 기꺼이 마음을 내놓기에 나는 인색했다.
커다란 바위처럼 그 자리에서 바람막이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도 세월의 무게를 버거워하셨다. 캐나다로 떠나려니 부모님께서 강퍅한 세상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 노파심이 들었다. 정답게 하나씩 알려드리면 좋았으련만, 요령 없는 부모님을 자꾸 다그쳤다. 곁에 있지도 못하는데, 남들이 내 부모를 세상 물정 모르는 분별력 없는 노인으로 폄훼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노년의 고독은 유아기의 애착 손상과 비견되는 심리적 충격을 준다고 한다. 출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엄마의 나이는 점점 어려졌다. 50년 전, 친정아버지(나의 외할아버지)가 섭섭하게 했던 일, 40년 전 시어머니(나의 친할머니)에게 무시당한 기억을 꺼냈다. 해묵은 앙금은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졌다. 최대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지만, 다정한 시선으로 엄마를 두루 살피기에는 인내심이 부족했다.
“엄마, 할머니는 벌써 15년 전에 돌아가셨잖아. 아직도 할머니가 그렇게 미워? 할머니 무덤에 가서 따지기라도 할 거야? 그러면 분이 풀려? 다 지난 일이잖아... 과거 때문에 현재를 엉망으로 만들면 엄마만 손해야.”
엄마는 가만히 내 말을 듣더니 속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옛날에 엄마의 숙모가 그런 얘길 해줬어. 숙모네 친정 오메가 동네 사람들 흉볼 때마다 숙모가 토를 달았대. 그런 말 말라고. 친정 오메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게 가장 후회된다면서, 나에게 당부하더라. 친정 오메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받아 주라고. 그래서 나도 네 외할머니가 동기간 얘기, 자식 얘기할 때, 무조건 다 들어 드렸어. 효도가 다른 게 없더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 달라는 엄마의 신호를 읽지 못했다. 엄마를 ‘엄마’라는 역할로만 본 것이다. 엄마는 평생 나의 응석을 다 받아줬는데, 나는 엄마가 잠깐 기대고 싶어 할 때 인정머리 없었다.
이걸 깨닫게 된 것은 밴쿠버에 도착하여 아버지의 폐렴 소식을 들은 후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시국에 폐렴이라니. 놀란 것은 병원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 19와 관련된 각종 검사가 진행되었는데, 다행히 결과는 코로나 19와 무관한 세균성 폐렴이었다. 당황한 의료진은 환자인 아버지와 보호자인 엄마의 불안을 헤아리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부모님은 마음의 상처를 입으셨다.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전시에 준하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한 불가피한 사건이었다. 적절한 사과를 받지 못한 부모님은 존재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성을 놓아버리셨다. 남동생이 한 밤 중에 전화를 걸어 SOS를 요청했다. 코로나 19 상황이라 다른 병원이 폐렴 환자를 거부할 수도 있는데, 부모님들은 막무가내로 병원을 옮기겠다고 어깃장을 부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당장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의사 선생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큰일이 날 수도 있다고 설명을 해도, 이런 병원에는 더 있고 싶지 않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뉴스에 진상 노부부로 대문짝만 하게 나오려고? 의사들도 사람이야. 코로나로 밤낮없이 정신없다 보니, 말실수 좀 한 거잖아. 겨우 그런 걸로 화를 내셔? 폐렴 환자를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만.”
“네 동생이나 너나 허구한 날 남의 편이냐? 왜 자꾸, 병원 편만 들어?”
“네 편 내 편이 어디 있어, 병원에서 아버지 고쳐 준다잖아.”
엄마는 전화를 확 끊어 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엄마가 옹심이 나면 아무도 못 말렸다. 물리적 거리가 원망스러웠다. 캐나다에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순간, 엄마의 숙모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야 엄마의 바람을 알 것 같았다. 엄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왜?”
“엄마, 미안해. 내가 놀라서 실언을 했네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 말이 다 맞더라. 코로나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의료진이 잘못했네. 우리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
엄마는 그제야 병원에서 겪었던 억울한 일들을 털어놓았다. ‘의사 선생님들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고 설득시키고 싶었지만 꾹 참고 끝까지 들었다. 한창 섭섭함을 토로하던 엄마는, ‘하긴, 의사들도 힘들겠지...’라며 ‘그냥 이 병원에 있어야 하나?’고 말을 흐렸다. 나는 엄마가 편한 방향으로 결정하시라고, 어떤 결정이든 지지한다고 대답하며, ‘혹시 다른 병원 갔다가 폐렴 환자를 안 받을까 봐 걱정되긴 한다.’고 살짝 덧붙였다.
그 후, 부모님의 노여움은 가라앉았고, 의료진들은 감사하게도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치료해주셨다. 아버지는 퇴원하고 체력이 회복되어 몸무게가 2kg가량 늘었다고 한다. 부모님은 코로나 19가 무사히 지나가면 손녀들 만나러 밴쿠버에 가기 위해 부지런히 몸과 마음의 건강을 관리 중이시다.
엄마가 원한 것은,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이었다. 공감은 거창한 게 아닌데, 이 단순한 걸 몰랐다.
요즘 나는 ‘편들기’ 훈련 중이다. 엄마와 매일 통화할 때마다 맞장구치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쉽지 않다. 대화 중에 불쑥 튀어나오는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
낯간지러운 ‘효도’ 같은 건 모르겠다. 엄마의 숙모님처럼 후회하지 않으려면 제한된 조건이지만 최소한의 도리를 하고 싶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여행을 가는 게 옷 한 벌 사는 게
어색해진 사람
바삐 지내는 게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해진 사람
한 번이라도 마음 편히 떠나보는 게
어려운 일이 돼버린 사람
동네 담벼락 피어있는 꽃들을 보면
아직도 걸음 멈추는 사람
엄마의 사진엔 꽃밭이 있어
꽃밭 한가운데 엄마가 있어
그녀의 주변엔 꽃밭이 있어
아름답게 자란 꽃밭이 있어
- <엄마의 프로필 사진은 왜 꽃밭일까>, 김진호 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