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캐나다

by 세일러킴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는 평생 일밖에 몰랐다. 그 시절 대부분 중년 남성들처럼 아버지 역시 직장이 우선이었다. 가정적이지 않은 아버지에 대하여 불만은 없었다. 친구 아버지, 옆집 아저씨, 친척 어르신들도 비슷비슷했기에 본디 아버지란 그런 존재인 줄 알았던 것이다.


취미도 없고 노는 법도 몰랐던 아버지는 퇴직 후 급격히 기력이 떨어지셨다. 현역 시절 못지않은 정신력과 체력을 유지하고 있는데 더는 갈 곳이 없다는 게 당황스러우셨나 보다. 연금은 가족사로 인해 반쯤 증발한 상태였다. 한창 일 할 체력이니 가정경제도 곧 회복될 거라 기대하셨지만, 착각이었다. 주유소, 인근 학교 청소 등 어렵게 직장을 구해도 젊은 사람들이 들어오면 바로 해고되셨다. 우울감을 달래줄 유일한 친구는 소주였다. 결국 아버지는 대장암 선고를 받으셨고, 오랜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아버지는 보험 하나 없었다. 살림은 더욱 휘청거렸지만 나와 남동생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터라 부모님을 부양할 형편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병간호와 줄어드는 수입에 엄마의 심신도 불안정해졌다. 여기까지가 아버지 퇴직 후 우리 가족에게 벌어진 악순환이다.



노년기의 고통은 빈곤, 질병, 고독, 무위(할 일이 없음)이라고 한다. 아버지의 지난 10여 년은 노년기에 접어든 평범한 서민이 어떻게 주저앉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한국의 노인인구 증가 속도는 쿠바에 이어 근소한 차이로 세계 2위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접어든 100세 시대. 단순한 장수가 아닌 노후의 행복한 삶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다.

아버지와 주변 어르신들을 지켜보니 실버세대의 경제활동이야 말로 최고의 노인복지가 아닐까 싶었다.


농부였던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생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 이젠 좀 편히 지내시라고 자식들이 성화여도, 수확물을 자손들에게 나눠주는 즐거움을 포기 못하셨다. 고된 노동에 어깨도 허리도 구부정하셨지만 큰 병 없이 성성하게 잘 돌아다니셨다. 외할머니는 가끔 뒷산에서 뜯은 고사리로 용돈벌이를 하셨는데, 서른 넘은 손녀 손에 꼬깃꼬깃한 지폐를 쥐어주곤 하셨다.


밴쿠버에 와서 인상적인 광경은 정력적으로 일하는 노인들의 모습이다. 대형마트는 물론 동네 슈퍼마켓에서도 물건을 진열하거나 계산대에 서있는 시니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거리에는 탑과 레깅스 차림으로 달리는 할머니,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할아버지도 많다. 내가 다니는 요가 스튜디오에는 연세가 아주 많은 호호 할머니도 참여하고, 사이좋은 노부부도 계신다. 6년째 개근 중이라는 할아버지와는 매일 인사를 나눈다.

노인일하는모습.jpg 마트에 가면 일을 하는 시니어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밴쿠버는 노인들도 경제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 같다는 짐작이 맞는지 궁금했다. 초보 이민자의 일천한 경험으로 답을 찾을 수 없어 취재를 해보았다.


밴쿠버 온라인 한인 카페에서 중고물품을 거래하다가 50대 중반의 데이케어 센터(유치원) 교사인 안나 언니(가명)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안나 언니는 한국에서 사립유치원 원장이었는데, 40대 중반에 밴쿠버에 온 후 데이케어 선생님이 되었다. 첫 해에는 영어도 안 통하고 일이 익숙하지 않아 힘들었지만, 이 년 차부터는 적응이 되어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고 한다. 이 데이케어 센터에는 안나 언니보다 나이가 많은 선생님도 여럿이다. 본인만 원하면 언제까지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안나 언니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70살까지 데이케어 교사로 근무할 예정이라고 한다.


브런치를 통해 알게 된 H님은 목수다. 한국에서 화이트 컬러였던 H님은 42세에 조기퇴직을 하고 40대 중반에 밴쿠버로 이민을 왔다. H님은 2005년부터 주택의 외벽을 붙이는 '사이더 헬퍼(Sider Helper)‘을 거쳐 벽면, 지붕 세우는 일을 하다가 현재는 걸레받이(Baseboard)와 문 옆의 몰딩(Casing)을 담당하는 마감 목수 일을 하고 있다.

15년 가까이 현장에서 근무를 하며 경험한 밴쿠버의 속살이 궁금했다. 정말로 능력과 체력만 된다면 나이와 무관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걸까?


“좋은 나라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백문이 불어 일견. 제 이력서를 보면 확인하실 수 있어요. 이력서에 출신 국가, 나이, 학력, 성별이 적혀있지 않죠? 현장 경험 경력만 나열되어 있어요.
물론 일을 못하면 바로 잘리죠. 하지만 성실하게 제대로 하면 정년이 없어요.
나이? 일절 물어보지 않아요.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말없이 회사를 안 나오는 경우도 있어서, 저처럼 경력 많은 사람을 선호해요. 책임감 있다고.
그동안 이 나라에 많은 세금을 냈지만, 아깝지 않아요.
곤경에 처하면 캐나다의 사회 보장제도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실감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교통사고가 났었는데, 그때 받은 보험금은 그동안 냈던 자동차 보험료가 하나도 아깝지 않을 액수였어요.
여기는 암에 걸리면 정부가 일단 환자 운전면허를 취소시키고 병원 왕복 택시비까지 줘요. 검사비, 치료비 무료는 당연하고. 아는 분이 위급해서 헬기로 이송됐는데, 전부 무료였대요.
제 또래 한국 친구들은 거의 다 퇴직을 했어요. 여전히 일하고 있는 저를 부러워하더라고요.
저도 기초 연금이 나오는 65세쯤에는 은퇴를 할 거예요.
누가 강요해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제 스스로 그만두는 거지요.
노후생활이 어렵지 않을 만큼 연금이 나오니까요.”


목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권중돈 교수에 따르면, 2050년이 되면 전 세계적으로 인구 고령화가 모든 국가의 공통 사항이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노년기에 직업을 갖게 되면 가정경제가 안정되고, 사회적 관계망을 유지할 수 있다. 가계소득 하락에 따른 불안감이 줄어들고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소속감도 계속되니 정서적으로 만족감이 높아진다. 또한 노인복지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도 절감되고 지속 가능한 사회경제체계 구축에도 도움이 된다.


노인의 경제활동 참여는 긍정적 효과가 크지만, 마냥 환영하기에는 고려해야 할 요소도 있다. 우선 청년 실업문제와 노인 일자리 확대를 조화롭게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업무 형태가 다양화되고 생산성에 맞는 임금이 지급되며 사회 안전망도 갖추는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

고령의 노동자는 젊은 동료들과 소통이 어렵고, 잦은 질병에 시달릴 확률이 높으며, 업무와 관련하여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거란 인식도 개선되어야 한다. 시니어들의 인생 2막 도전에 박수를 보내는 것은 우리들의 부모님, 더 나아가 고령화 시대를 살아갈 ‘미래의 나’를 향한 응원이다.


한국의 노인복지정책이 많이 좋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한국의 의료보험제도는 세계 최고라고 자부한다. 국민건강보험이 점점 더 좋아지면서 부모님께서도 많은 혜택을 받고 계신다. 기존에는 비급여 항목이었던 고가의 치료약이 의료보험 적용이 되면서 가계부담도 훨씬 줄어들었다. 노인 돌봄 서비스도 수정·보완되고 있는 중이니, 한국의 노인복지도 우리 문화에 알맞게 맞춤 발전할 것이다.


다만, 40대 중반이 되니 더 이상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쿨하게 넘어가지지 않더라. 정년을 고민하는 또래가 하나둘씩 생기다 보니 덩달아 조급해진다. 이룬 것도 없는데 끝이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가, 이번 생은 여기까지인가 싶어 주눅이 든다.


70세까지 일 하고 싶다는 안나 언니의 소망과, 기술만 있다면 정년이 없다는 H님의 조언을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든다. 새로운 일을 배워도 20년 이상 지속할 수 있는데, 왜 스스로 한계를 규정한 걸까?


아무 생각 없이 밴쿠버에 와서 몸도 마음도 편해지니 무료해졌다며 배부른 투정을 했던 게 몹시 부끄럽다. 낯선 나라에서 적응하기 위해 밤낮없이 분투 중인 분들에게 죄송하다.

노력 여하에 따라 평생 일 할 수 있는 나라에 살게 되었다. 할 수 있었던 일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가 남을 것이다. 이제라도 철 좀 들어야겠다.


나는 은퇴(retirement)를 're-tire', 그러니까 '타이어를 가는'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바퀴를 새로 장착하고 신선한 자극과 새로운 충동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 삶이 끝날 때까지 사는 것이다.


은퇴는 커리어로 특정 지어지는 시기의 끝이 아니다. 새로운 단계, 아마 가장 중요한 단계의 시작이다.


- 토마스 무어, 나이 공부 중에서 -


* 노인복지와 관련된 내용은 목원대학교 권중돈 교수의 '고령사회와 노인복지' 온라인 강의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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