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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Mar 12. 2021

피드백은 따끔하지만

감사히 영향받겠습니다.

 이민자의 나라답게 캐나다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이 다양하다. 

학교에는 ELL(English Language Learning Service) 수업이 있고, 17세 이상 영주권자는 정부가 지원하는 LINC(Language Instruction for Newcomers to Canada)에 다닐 수 있다. 당장 영어공부가 시급하지만, 아직 영주권자가 아닌 관계로 LINC를 신청할 수 없어 독학을 하고 있다. 영어공부 유튜브 ‘Live Academy’의 빨간 모자 선생님을 랜선 스승으로 모셨지만 의지 부족 탓인지 능률이 오르진 않는다. 영어 공부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자 한 지인분이 공립도서관에서 개설한 무료 영어수업을 추천했다. 지난 늦가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도서관 영어수업에 참여하고 있는데, 현재는 팬데믹으로 인하여 온라인 강좌로 진행 중이다. 


 난생처음 경험하는 온라인+원어민 영어 수업은 만만치 않았다. 

 매 수업마다 ‘acceptance(수용)’, ‘initiative(진취성)’, ‘moderation(절제)’, ‘purposefulness(합목적성)’, ‘mindfulness(마음 챙김)’ 등 하나의 virtue(미덕)가 주어지는데, 교재는 선생님이 직접 제작한 virtue에 대한 짧은 글이다. 

수강생은 예습으로  짧은 글을 미리 읽어 오고 해당 virtue가 들어간 문장을 만들어 와야 한다. 수강생들이 “이 강의는 영어 수업이냐? 철학 수업이냐?”라고 장난 섞인 투정을 할 만큼 쉽지 않은 주제다. 사정이 이러하니 첫 한 달은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안 그러면 좋겠는데, 선생님은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대답할 기회를 주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호명하면 심장은 요동친다. 질문 자체를 모르니 대충 아는 단어 몇 개를 더듬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그냥 넘어가 주면 좋으련만 무슨 뜻인지 더 자세하게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기도 한다. 그럴 때는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아무 말이나 지껄인다. 온라인 수업의 단점은 모든 수강생의 시선이 화면 가득 잡힌 당황한 내 얼굴로 집중된다는 점이다.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나의 존재는 쪼그라들었다.      


‘mindfulness’에 관한 수업 날이었다. 평소에 관심을 갖고 있던 내용이라 대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이라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사달이 났다. 선생님이 숙제로 작성해온 문장을 발표하라고 주문했다. ‘The book is...로 시작하는 비교적 쉬운 문장이었는데, 첫 단어인 'the book'부터 막혔다. 아무리 “더. 북.”이라고 또박또박 말해도, 선생님이 이해하지 못했다. ‘인터넷 연결이 불안정한가? 이어폰 마이크가 고장 났나?’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결국 종이에 ‘THE BOOK'이라고 커다랗게 써서 카메라 렌즈 앞에 비추었다. 선생님은 ‘B’와 ‘P’의 발음을 구별해야 한다며 ‘the book’을 한 번 더 말해 볼 것을 요구했다. 여러 차례 시도해도 ‘OK’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얼굴은 물론, 양쪽 귀까지 빨개졌다. ‘book' 쯤은 중학교 1학년 때 마스터한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book’도 발음하지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았다.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망신을 당해가며 수업을 들어야 하나 싶었다. 랜선 스승인 빨간 모자 선생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다른 도서관 강의를 신청할까, 며칠 동안 복잡한 심경이었다. 영어 초보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통과의례 중 하나일 것이다. 누군가는 이 정도쯤은 영어를 못해서 겪는 서러움 축에도 못 낀다고 할 것이다. 안 해도 될 생각을 부풀려 의기소침 해 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볼 빨간 신선놀음’이란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게 되었다. 까다로운 입맛의 출연자를 만족시킬 요리를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47년 경력 중식 대가, 요리 대회 심사위원, 국제 요리대회 수상자 등 최고의 셰프들도 출연자들의 날카로운 피드백을 피하지 못했다. 특히 권위 있는 국제요리대회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던 한 셰프는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자리가 오랜만인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경지에 오른 장인의 결과물에도 보완 사항은 있다. 현재의 결과물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익숙하고 편한 방식만 고수하면 성장은 멈춘다. 피드백은 타인의 영향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성장하겠다는 수용의 태도다. 백신 주사를 통해 감염병을 예방하듯, 피드백은 당장은 따끔하고 아파도 내면을 강건하고 단단하게 성장시킨다.    

  

사진출처- MBC 홈페이지


 고작 이 정도의 피드백에 도망치면 진짜 ‘바보’라는 자각이 들었다. 기본 중의 기본까지 지적받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하면 될 일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뒤, 심기일전하여 예습을 했다. 특히 평소에는 무심결에 지나쳤던 익숙한 단어들의 발음 하나하나를 검색했다. 


‘hope’는 [호프]가 아니라 [호웁], ‘your’는 [유어]가 아니라 [요어]였다. 발음까지 점검하려니 예습 분량이 많아졌지만, 수업에 참여하는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같은 극적 반전은 없다. 여전히 질문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여 엉뚱한 답변을 내놓아 선생님의 따끔한 피드백을 받고 있다. 다만 기가 죽었다가 회복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 같다. 피드백을 받는 순간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지만 어깨 한 번 으쓱, 심호흡 한 번 내쉬고 재도전하려 한다.        


 그러니 글에 대한 피드백도 환영이다. 

 피드백은 따끔하지만, 감사히 영향받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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