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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Mar 05. 2021

세속적 욕망과 화해하기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넷플릭스는 아는 이 없는 낯선 나라에서 만난 고마운 친구다. 최근에는 미드 ‘브리저튼’과 ‘열혈 사제’ 박재범 작가의 신작 ‘빈센조’를 덕질하고 있다. 

‘브리저튼’은 극강 비주얼 커플이 썸 타는 것을 발그레 지켜보다가, 입이 떡 벌어지는 29금 장면 등장으로 하마터면 심장마비 올 뻔했다. ‘브리저튼’의 베드신은 단순한 ‘야한 장면’이 아니다. 복수심으로 가문의 대를 끊기 위해 결혼을 거부한 남성과 사랑 넘치는 가정을 꿈꾸는 여성의 욕망이 부딪히는 필연적 사건이다.(아쉽지만 스포 예방 차원에서 이만 줄인다. 쩝.)

‘빈센조’는 승리호 타고 날아온 마피아 변호사가 대한민국의 적폐 세력을 불바다 날려버린 판타지 드라마다. ‘괴물은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박살내야 한다.’는 메시지에 동의하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저런 천하의 몹쓸 악마들을 ‘우리 편’ 악마가 응징할 때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다. 


사진출처 - 넷플릭스 브리저튼 공식 사이트


 물론 요즘의 가치관에 따르면 두 드라마는 비판의 여지가 많다. 잘난 배우자를 찾는 여성들의 쟁투는 시대착오적이고, 사회 시스템이 아무리 무능해도 사적 복수는 잘못이다. 행복한 가정에 대한 욕망, 갑질 하는 놈들 망해버렸으면 하는 울분 따위는 거룩한 미덕 - 정의, 신념, 사랑, 추구, 진심, 정직, 성실, 활력, 용기, 수용, 절제, 개방성, 친절, 배려, 나눔 등 - 에 비해 떳떳지 못하다. 어떤 이는 은밀한 욕구를 시원하게 해소시켜주는 이런 이야기를 조미료 범벅 불량식품으로 간주할 것이다. 실은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정도와 완성도 차이는 있지만, 넓은 범주에서 ‘브리저튼’이나 ‘빈센조’는 ‘아내의 유혹’ 계열에 속한다.  

   

20세기 말, 대한민국은 파산했다. IMF는 우리 사회를 각자도생, 약육강식의 전쟁터로 바꿨다. 전통적인 공동체 정신은 철 지난 유행가가 되어버렸고, 약자를 짓밟아서라도 '부자 되세요'만 실현하면 칭송을 받는, '헬조선'이 완성됐다.


전쟁통에 나 같이 어리바리한 캐릭터는 십리는커녕 두 걸음도 못 가 비명횡사 각이다. 안 죽으려면 방구석으로 피신해야 한다. 창문 밖으로 바라본 세상은 무간지옥이다. 거짓, 불의, 기만, 이기심, 허영, 강요, 집착, 교만, 무례함 등으로 무장한 탐욕의 화신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악귀들을 손가락질하며 신성한 가치를 소중하게 지키기로 다짐했다. ‘브리저튼’의 사이먼과 아찔한 연애도 하고 싶고, ‘빈센조’가 날 모욕한 저들을 앙갚음해줬으면 좋겠고, ‘펜트하우스’에 살고픈 갈망이 있다. 그러나 ‘저급한’ 세속적 욕망은 척결 대상이었다. 저런 세속적 욕망이 세상을 망쳤다고 믿었으므로.     


 ‘저급하다’고 낙인찍힌 세속적 욕망은 내밀한 곳에 갇혀 있다가 바깥세상에 나갈 때마다 난데없이 튀어나왔다. 세속적 욕망을 용납하면 내 안의 신성이 더럽혀질까 봐 더욱 깊은 곳에 봉인시켰다.    

 

 내 나라를 떠나 새로운 환경에 리로드 하는 과정에서, 내내 푸대접 해왔던 세속적 욕망을 소환해야 했다. ‘인정 욕구’는 내 안에서 높은 지분을 차지하는 세속적 욕망이다. 남의 나라에서도 쓸모 있는 인간임을 인정받고 싶어 브런치에 꾸준히 글을 올렸다. 베트남에서 타향살이 중인 S언니는 ‘겁 없이 솔직한 글’이라고 평했다. 시작은 ‘인정 욕구’였지만, 연재를 통하여 그동안 자각 못했던 내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 것이다.     

 

‘세속적 욕망’도 ‘거룩한 미덕’도 각각 50/100 만큼 중요하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거룩한 미덕을 90/100 이상으로 올리고, 세속적 욕망을 0 가까이 수렴해야 한다고 오해하기 쉽다. '거룩한 미덕'을 외면하고 '세속적 욕망'으로 무장한 ‘탐욕스러운 갑’들의 아둔한 선택 때문일 것이다. 탐심에 눈이 멀어 세속적 욕망'만' 추구한 어리석은 자들에 대항하고자, 자기 안의 세속적 욕망을 모른 척하는 것도 현명한 태도는 아니다. 세속적 욕망과 거룩한 미덕이 균형을 이룰 때 진정한 성장이 이뤄진다. 이와 관련하여 故 김대중 대통령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오해 없기 바란다. 미덕과 악덕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신념, 사랑, 정직, 성실, 용기, 수용, 평등, 자유 등 거룩한 미덕이 세상을 구한다. 사랑은 미움보다, 정직은 기만보다, 용기는 비겁함보다, 공정은 불공정보다 절대적으로 옳다. 


 다만 스스로 규정한 거룩한 미덕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점검해보자는 것이다. 신념을 누군가는 똥고집으로 느끼고,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간섭과 집착이 된다. 정직은 무례함, 용기는 만용, 공평은 기계적 중립이 되기도 한다.     


 유관순 열사의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다는 신념은 숭고하다. 그것과 ‘스스로 규정한 신념’을 혼동하면 안 된다. 

자신의 신념이 진정한 의미의 신념인지 의심해야 한다. 자기 객관화의 부재로 벌어진 비극의 역사는 흔하다. 중세 시대의 마녀사냥이 그랬고, 스탈린 시대엔 피바람이 불었다. 우리나라의 빨갱이 사냥과 종북좌파 몰이도 그렇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 ‘사랑’에 대한 부모의 착각이 자식을 비운의 주인공으로 만든다. 누군가 ‘자식을 향한 사랑을 버려라’고 조언한다면 부모는 용납할 수 없다.  ‘사랑’은 아름답고 고귀하다. 단, ‘스카이캐슬’의 곽미향 여사도 예서를 사랑해서 그랬다. ‘사랑’을 어떻게 정의 내렸는지 검토해봐야 한다. 나 역시 제대로 검토할 자신은 없다만.


 ‘거룩한 미덕’에 비해 ‘세속적 욕망’이 하찮지 않다.

 ‘브리저튼’의 ‘다프네’가 가부장적 가치에 예속된 여성이라고 해석할 수는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막연하게 ‘사랑하는 남편과 아이들로 이뤄진 가족’을 소망한다. 그 세속적 욕망은 ‘틀린 것’이 아니다. 화목한 가정에 대한 세속적 욕망도 존중받아야 한다.

 드라마 속 ‘다프네’는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비판을 받겠지만, 미래의 어느 날, 사회적 참사로 귀한 자식을 잃게 된 ‘다프네’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때때로 ‘세월호 사건’과 같은 사회적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이 사회변혁의 주체가 된다. ‘금쪽같은 내 새끼’를 잃은 엄마는 ‘신념의 강자’로 다시 태어난다. ‘다프네’의 세속적 욕망이 부조리한 세상에 저항하는 비타협 투사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방구석 몽상가 동료들이여. 세속적 욕망을 창피해 말자. 

음습한 지하에 감춰둔 세속적 욕망을 꺼내어 볕을 쪼이자. 

 특별히 수치심이 많거나, 불안이 심하다면 세속적 욕망을 온전히 드러내기 어려울 수 있다. 목욕탕에 가면 알몸도 괜찮다고 최면을 걸듯이, 세속적 욕망도 그렇게 접근해보자.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세속적 욕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욕망해도 괜찮다. 

 괜찮아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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