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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Feb 24. 2021

낙오해도 괜찮아.

내 속도대로 사는 연습하기

 “하는 짓이 누나를 빼다 박았어.”     


감추고 싶은 그늘이 자식에게서 발견되면 속상하다. 동생은 나의 기질과 성향을 큰 딸이 이어받았다고 했다. 서로의 장단점을 속속 알고 있는 가족의 인증이니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일 것이다. 하필 닮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까지 비슷할 때는 탄식이 절로 난다. 그런 건 좀 안 닮았으면 좋으련만.       


나는 눈치는 없는데 눈치를 본다. 방구석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어찌할 바를 몰라 시야가 좁아지는 반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크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하여 자꾸 오버를 한다. 섣불리 덤비다 보니 실수가 잦아서 구박도 꽤 받는다.


어리석은 행동이 반복되는 이유를 살펴보니, 인정 욕구와 더불어 속도가 문제였다.

나는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사람이 못된다. 겁이 많기 때문에 긴장이 풀려야 비로소 주변을 탐색할 여유가 생긴다. 상황 파악이 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내 속도대로라면 남들 저만치 달려갈 때까지도 출발선 어딘가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출발선에서 꾸물거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질타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당장 뒤쫓아 가지 않으면 영영 뒤처진다고.

 낙오되는 것이 두려웠나 보다. 태생이 남보다 느리다는 것을 몰랐다. 주제 파악을 못하니 남들 흉내만 냈다.  

 무리에서 낙오되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쫓아간 결과가 좋을 리 없다. 그런 자신이 한심해서 괜한 자격지심에 방구석으로 숨었다. 어떤 이에게는 고립이 와신상담의 기회겠지만, 나의 고립은 현실도피다. 방구석에서 숨어 지내다가 외로움에 사무쳐 밖으로 뛰어 나가면 눈치도 없으면서 눈치를 보다가 주눅 들고 또다시 방구석으로 숨어버리는 발작적인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나마 내 나라에서는 방구석과 바깥세상을 오며 가며 근근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이 없는 남의 나라에 살려니 미숙하고 부족한 모습만 부각된다. 인파로 북적이는 광장에 벌거벗고 서 있는 느낌이다.


 딸들도 다르지 않았다. 학교생활이 시작되자 큰딸의 고립적인 성향은 도드라졌다. 한국 학생 한 명 없는 교실에서 영어 못하는 큰딸은 정해진 수순처럼 ‘아싸’의 길을 갔다. 책가방을 맨 아이의 어깨는 항상 축 쳐져 있었다. 본인도 지켜보는 부모 마음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아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오늘 누가 전학을 왔는데, 새로 온 애는 영어를 잘하니까 핵인싸 그룹이랑 놀더라고... 학교 다닌 지 석 달이 지나도록 반 애들과 말 한마디 못 섞었는데... 걔가 너무 부러웠어. 나도 한국에서는 친구들 많았잖아... 학교에서 애들이랑 수다도 떨고, 장난도 치고 싶단 말이야...”    

 

나쁜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아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적응할 ‘때’를 기다려야 했는데, 마음이 불편해서 개입을 결심한 것이다. 그날부터 큰딸의 친구가 될 만한 아이를 물색했다. 큰딸이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얼마 후, 또 다른 새로운 전학생이 왔다.

이란계 소녀 캐리(가명)는 큰딸과 함께 ELL(English Language Learning Service,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을 위한 수업)을 듣는다고 했다. 가까워질 틈을 엿보다가 하교 길에 캐리 부모님들과 마주쳤다. 쪽팔림을 무릅쓰고 캐리 어머님에게 말을 걸었다. 캐리 어머님도 캐리처럼 따뜻하고 깊은 눈빛을 가진 여성이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 딸도 이번 학기에 왔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 했다. 대화 중에 수업이 끝난 아이들이 다가왔다. 캐리가 나와 큰딸에게 활짝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큰딸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얘기했다.     


“어머님이 되게 좋은 분이셨는데, 캐리도 참하고 착해 보이더라. 그 친구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라며. 앞으로 서로 의지하면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네.”     


내심 잘됐다고 생각하며 떠들었는데, 큰딸의 반응이 떨떠름하다.      


“별로 친구 사귀고 싶지 않은데.”     


엥? 엊그제 반 애들이랑 어울리고 싶다며 펑펑 울지 않았던가? 혹시 캐리가 마음에 안 든 건가 싶어서 물어보니 그건 아니란다.     

 

“당분간은 혼자 다닐래. 아직은 지켜보고 싶어.”     


답답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통과의례를 미루려는 것은 아닐까 노파심이 들었다. 먼저 다가가는 용기도 필요하다고 사족을 다니 아이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뿔싸. 괜히 사춘기 '그분' 심기 건드렸다가 뒷감당 못할까봐 잔소리를 꿀꺽 삼켰다.


리세스(recess, 중간놀이 시간) 때도, 점심시간에도, 큰딸은 혼자 지낸다고 했다. 저러다가 졸업여행에 같이 갈 친구도 없고, 초등학교 졸업식 날 사진 함께 찍을 친구도 없으면 어떻게 하나, 온갖 망상이 밀려왔다. 물음표가 떠올랐다. 아이는 혼자 다니는 게 편하다는데, 엄마가 조바심 난 이유가 뭘까? 아이를 보면서 또래집단에 소속되지 못할까 봐 불안했던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던 것이다. 큰딸은 학교생활이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소설도 읽고, 그림도 그리면서 나름 충실하게 지내고 있었다. 조직에 빨리 소속되고 싶어서 의존할 누군가부터 찾는 나와 달랐다. 아이는 떠밀리듯 억지로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출발 시점을 몸소 정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보름도 지나지 않아, 큰딸은 캐리와 절친이 됐다. 캐리는 BTS와 K-웹툰을 좋아하는 ‘한류팬’이었던 것이다. 주변에 하나 둘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이 모였고, 일본 애니메이션 마니아들까지 가세하여 놀이 집단이 형성됐다.

이제 큰딸은 리세스 시간에 친구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BTS 근황에 관한 정보도 교류한다. 캐리가 카카오 페이지에서 연재 중인 웹툰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에 관한 팬심을 토로할 때마다 큰딸은 따봉을 날려준단다.(카카오 페이지 웹툰이 다양한 나라 언어로 제공되는 모양이다. 세계로 뻗어가는 K-웹툰 만세다.) 제패니메이션 마니아인 다른 친구에게는 ‘귀멸의 칼날’의 ‘네츠코’ 캐릭터도 그려줬다.(큰딸은 욱일기 논란 때문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애니메이션이라고 한다)


큰딸이 새로 사귄 친구에게 그려준 '네츠코'


 큰딸이 옳았다. 나와 닮은 줄 알았던 아이는 자신만의 속도대로 살아갈 줄 아는 청소년으로 훌쩍 자랐다.

 큰딸은 낙오를 걱정하지 않았다. 낙오라는 마인드가 없었다. 낙오의 프레임을 만든 것은 나였다. 아이는 대오에서 탈락할까 봐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각자의 속도와 방식대로 참여해도 괜찮다는 것을 보여줬다. 세 살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더니.


 자기 속도대로 사는 것은 스스로의 상태를 미리 재단하는 것과 다르다. 문 밖은 위험하다며 방구석에서 기약 없이 준비만 하는 것도 아니다. 타고난 조건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수용하고 삶의 흐름에 자연스레 몸을 맡기는 유연한 태도다. 빠른 것도 느린 것도 없다. 각자에게 적정한 속도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도 이젠 느리게 살아 보려 한다. 느긋하게 뒤따라 가는 연습을 해보려 한다.

 낙오란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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