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스쿨링은 아무나 하나

우리 집은 여전히 겨울방학 중

by 세일러킴

BC주 존 호건 수상은 5월 6일 오후 특별 기자회견을 열고 '새로운 일상'을 강조하며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사회적 거리두기 명령은 계속 시행되고 있지만, 워낙 집콕 성향인 우리 가족들은 큰 불편을 못 느끼고 있다. 코로나 19 확산 방지를 위한 외출 자제는 칭찬받을 행동인데,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 두 딸을 보고 있으면 울화가 치민다. 팬데믹으로 인한 우울증 예방 차원에서 안전거리를 확보 한 가까운 공원 산책은 권장 사항이라고 설명해도 요지부동. 어르고 달래 겨우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꼴랑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투덜거림으로 인내심을 시험한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외치며 오늘도 침대와 한 몸이 된 저 집순이들, 어찌하오리까!



지난주는 내내 비가 왔다. 한국은 벌써 초여름 날씨라는데, 밴쿠버 산동네의 우리 집은 아직도 으슬으슬하다. 미드를 보면 거실에서 카디건을 입고 두꺼운 목양말을 신는 장면이 의아했는데 이젠 이해가 된다. 혹시나 하여 한국에서 가져온 기모 내복을 5월까지 집안에서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최근 부쩍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오락가락하더니, 엊그제는 우박까지 내렸다. 오늘은 유난히 더 몸이 찌뿌드드하여 오전 내내 잤다. 간만의 늑장이다. 별일 없는 일상의 반복이지만, 이럴수록 생활 리듬을 망가뜨리면 안 될 것 같아 제법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꽤 오래 버틴 셈인데, 밴쿠버 온 지 두 달쯤 되니 슬슬 게으른 본성이 올라온다.


첫째 딸이 글에 잘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첫째가 사춘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다르게 까칠해지는 첫째를 가급적이면 내버려 두고 있다. 직장맘으로서 아이들의 응석을 제때 받아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첫째는 돈 없어도 좋으니까 엄마가 회사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칭얼거렸고, 둘째는 몸이 아플 때마다 오늘 하루만 함께 있어달라고 울먹여 속을 끓였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곁에 엄마가 없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던 첫째가 변했다. 허그 같은 스킨십을 거부하고, 다가가기만 해도 질색이다. 곁에 있어달라고 할 때는 없더니, 이제 와서 귀찮게 질척대는 엄마가 된 것이다. 네 명의 아이를 키우는 육아 베테랑 친구에게 물어보니 아직 사춘기는 시작도 안 했다고 진단했다. 24시간 좁은 집에서 마주하고 있으려니 서로 못마땅한 구석이 드러난다. 이러다가 틀어지면 아이들이 마음의 문을 닫고 소통을 거부할까 봐 조심스럽다. ‘학습능력 높이기’보다 ‘자녀와 좋은 관계 지속하기’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렇게 손 놓고 있다가 학교 다니게 되면 수업은 따라갈 수 있을까 노파심이 난다.


‘피니와 퍼브’는 우리 집 애들이 좋아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다. 피니와 퍼브라는 두 형제가 무려 104일 동안이라는 여름방학 기간 동안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프로젝트를 해치우는 이야기다. ‘피니와 퍼브’를 볼 때마다 딸들이 이구동성으로 ‘쟤들은 방학이 104일이나 돼서 좋겠다.’를 외쳤다.


“얘들아, 너네는 9월까지 방학이잖니? 240일이 넘는 긴 방학이니까, 피니와 퍼브는 비교도 안 돼. 이대로 쭉 놀아도 괜찮겠어?”


작정하고 물었더니, 딸들의 표정이 떨떠름하다. 본인들도 심하다는 자각이 들었나 보다. 영어공부 하나도 안 하다가 학교 가서 말 한마디도 못하면 큰일 아니냐는, 치사한 협박을 덧붙였다. 첫째는 입이 댓 발 나오고, 둘째는 걱정이 한가득 되었다.

매일 영어로 된 영화나 드라마 1시간씩 보기, 수학 교재 한 장씩 풀기를 제안했다. 밴쿠버 온라인 한인 카페에 수학 교과서를 수소문했다. 아이들 학년에 맞은 교재를 구하지 못해서 한 학년 아래 것을 건넸는데, 첫째는 어렵다고 오만상을 찌푸린다. 하루 한 페이지라도 해달라고 사정했더니 마지못해 승낙한다. 한국 아이들은 대게 수학 천재 소리를 듣는다던데, 첫째가 예외인 건 확실하다. 속이 쓰리다.

KakaoTalk_20200507_073225673.jpg 사춘기에 접어든 첫째는 무조건 배운 적 없다고 잡아뗀다.


엄마표 홈스쿨링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홈스쿨링이 제대로 이뤄지려면 부모가 자녀보다 먼저 해당 교과를 공부하여 학습 목표를 이해하고 아이에게 명확하게 피드백해야 하지만, 나의 역량으로는 어림없었다. 아이들의 자기주도학습 습관이 저절로 생길 리가 없는데, 길잡이 노릇도 못할 거면서 안달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한마디 했다.


“일부러 갭이어(Gap year)도 갖는다는데. 천천히 적응해 가는 과정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또 성급했다. 쉬어가도 괜찮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문제는 애들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뒤처질 것 같은 나의 불안이었다.


근육은 잘 길들여진 소나 말 같은 사역 동물과 비슷하다.

주의 깊게 단계적으로 부담을 늘려 나가면, 근육은 그 훈련에 견딜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적응해 나간다.

‘이만큼의 작업을 잘 소화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기억이, 반복에 의해 근육에 입력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연습을 며칠 쉬어버리면, “어럽쇼, 이제 그렇게까지 힘쓸 필요는 없어졌구나. 아 잘됐다” 하고 자동적으로 판단하여 한계치를 떨어뜨려 나간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무라카미 하루키 -


‘불안 모드’ 일 때 이 책을 읽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각종 마라톤 대회에 수십 번 출전한 베테랑 러너다. 운동신경을 타고나지도 않았고 ‘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만큼 악착같은 면도 없지만, 꾸준하게 달린 덕에 좋은 소설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신체의 감각을 세세하게 감지하고 유연한 사고를 유지하려면 지난한 훈련이 필요하다. 중요한 건 ‘의지를 어디에 두는 가’이다. 목표 달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몸과 정신에 힘이 들어가게 된다. 목표 달성을 향한 의지는 ‘긴장’을 낳고, ‘긴장’은 불안감과 조급함을 일으킨다.

불안감에 휩싸였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현재 상태를 점검했다. 경직된 생각과 닫힌 마음을 이완시키려면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습관이 들 때까지 무라카미 하루키는 달리기를, 누군가는 요가, 명상, 참선, 운동, 연주, 노래, 그림... 등등 각자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연습하는 수밖에 없다.



KakaoTalk_20200507_072152498.jpg 동네 공원에서 뛰었다.


요 며칠 날씨를 핑계로 달리지 않았다. ‘하루쯤 걸러도 돼’라는 속삭임을 뿌리치고, ‘의지를 다해’ 운동화를 신었다. 바깥공기는 꾸물꾸물해도 습하진 않다. 뛰다 보니 굳어 있던 뇌가 풀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나름의 속도대로 잘 자라고 있다. 엄마로서 할 일은 조급증을 버리고 느긋하게 지켜 봐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KakaoTalk_20200504_094518795.jpg 우중충한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먹구름 사이로 무지개가 떴다.

맑은 날이 이어지도록 내일 또 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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