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살림도 한걸음부터

풋내기 살림꾼

by 세일러킴

집주인 제인으로부터 조심스레 문자가 왔다. 전년 대비 전기료가 많이 나왔단다. 오래된 목조건물이라 세대별 계량기 분리가 쉽지 않아 공과금이 포함된 월세를 받아 왔는데, 세입자가 전기를 많이 사용하니 당황한 것이다. 제인은 전기료 도둑의 주범으로 건조기를 지목하며, 작동 횟수를 줄일 방안으로 뒤뜰에 빨랫줄을 준비하겠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괜히 야단맞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기소침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이번 기회에 도덕적 해이와 방만 운영을 일삼았던 가정경영을 진단해보기로 했다.



밴쿠버 도착 후, 보직이 직장맘에서 풋내기 살림꾼으로 변경되었다. 적응능력이 낮은 편이라, 낯선 공간에서 새로운 과제가 수월해질 때까지 긴장도가 높아진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삼시세끼 책임자로서 부담이 밀려왔다.

경직된 몸과 마음은 자유로운 상상을 막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드라마에나 등장할 법한 현모양처를 떠올렸다. 미숙한 살림꾼이라 식사를 준비하여 차리고, 먹고, 디저트를 내고, 상을 치우고 나면 다음 끼니 시간이 다가왔다. 매번 상차림마다 플레이팅까지 힘을 줬다. 첫 주에는 상 위에 튤립을 꽂았는데, 반찬 먹을 때 방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침.jpg 아침부터 플레이팅까지 신경 써서 상을 차렸다.


된장찌개와 된장국 차이를 모를 만큼 요리에 무지했던 내가 살림살이 두 달 만에 김치, 깍두기까지 담그게 되었다. 베테랑 주부인 외할머니 손맛에 길들여진 딸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다. 궁하면 통한다고, 유튜버와 블로거를 스승 삼아 요리에 대한 감을 익혔다.


김치 깍두기.jpg 요리 초보인 내가 김치와 깍두기를 담그게 되었다.



서투르다 보니 조리 한 번 끝내면 주방은 난장판이 되었고, 부엌 개수대는 설거지 거리가 가득했다. 주부 습진을 달고 살던 터라 식기 세척기는 필수 아이템이었다. 고슬밥을 비롯하여 온갖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는 인스턴트 팟, 카펫 먼지 제거용 진공청소기, 세탁기, 건조기 등 각종 가전용품은 고마운 동료가 되어 주었다.

재택근무 중인 남편이 집안일에 성의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기기구 의존성이 심했던 것은 친환경과 거리가 먼 잘못된 생활 습관 때문이다.


창피한 고백이지만, 검약을 모르고 살았다. 휴지를 돌돌 감아 쓰고, 물티슈를 한 움큼 뽑아서 청소했으며, 음식물이 남으면 과감히 버렸다. 편리함을 앞세워 일회용품을 이용했고, 가성비가 낫다며 쓰던 물건을 고치는 대신 새것을 샀다.

몸에 밴 나쁜 버릇을 인지하게 된 계기는 자가 격리 기간이다. 저장품으로 두 주를 버티려면 뭐든 아껴야 했다. 특히 사재기 열풍으로 희귀템이 된 휴지가 줄어들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화장실에 갈 때면 휴지 칸 수를 헤아리며 물건 귀한 줄 몰랐던 지난날을 반성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전기료를 아껴보자는 제인의 제안도 이해가 됐다. 매일 세탁기와 건조기를 가동하고, 하루 세 번 식기세척기를 돌리며, 아침저녁으로 인스턴트 팟을 썼으니 전기료 폭탄이 터질 수밖에.

우선적으로 빨랫감과 설거지거리 줄이기부터 궁리했다. 나는 물론, 사춘기에 접어든 딸들까지 샤워할 때마다 수건을 두 장씩 쓰다 보니, 수건은 빨랫감 중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렇다 치고, 나만이라도 수건 사용 방법을 바꿨다. 속옷과 겉옷을 분리하여 빨고, 겉옷은 햇빛 좋은 날 뒤뜰에 널었더니 이틀 간격으로 세탁기와 건조기를 가동할 수 있었다.

식기세척기도 마찬가지. 기름기 없는 식기는 그때그때 따뜻한 물로 헹궈 건조대에 두었더니, 식기 세척기를 하루에 한 번만 돌릴 수 있었다. 주부습진은 고무장갑 속에 하얀 면장갑 끼기로 해결했다.

또한 유튜브로 냄비 밥 짓기를 배워 가급적이면 인스턴트 팟 작동도 자제하였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삶의 공식을 만들다 보니, 그동안 몰랐던 영역이 드러나고 있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생활 패턴으로부터 벗어나도 큰 무리가 없었다.

자동차도 그중 하나다. 없는 살림에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남편과 나 둘 다 차를 운행했는데, 밴쿠버에 와서는 차 없이 살고 있다. 캐나다는 보험료, 세금이 높아 자동차 유지비가 많이 든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형편이 나아질 때까지 최소 일 년은 차 없이 지낼 예정이다.

장 볼 때 조금 불편한 정도인데, 남편이 가끔 다운타운에 있는 회사에 나가야 할 때 한인마트에서 필수 식재료를 구입하고, 주말에 남편과 내가 배낭을 메고 대중교통으로 대형마트를 다녀오니 할 만하다. 짐 무게를 줄이려다 보니 부족한 식재료를 점검하여 쇼핑 목록을 작성하게 되었고, 따라서 충동구매도 사라졌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냉장고를 부탁해’를 찍기도 한다. 자연스레 상차림이 간소화되면서, 잔반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삼시 세끼 차리기도 여유가 생겼다.


장보기.jpg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를 타고 대형마트를 간다.


아이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지켜야 할 마땅한 의무를 게을리했던 일상이 부끄럽다. 내로남불. 심각한 환경오염으로부터 지구를 지키자고 강조해왔으면서, 어리석게도 지구를 아프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인데,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그런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이 이 것뿐은 아닐 것이다.

미성숙한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 유쾌하지는 않지만 자기 객관화를 게을리 하진 말아야겠다. 그렇게 한 걸음씩 가다 보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하지 않을까. 아직은 햇병아리에 불과하지만 이제라도 환경을 생각하는 살림에 눈을 떴으니, 언젠가는 ‘녹색살림이스트’가 될 날을 기대해 본다.



집주인 제인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아이들이 어려서 빨랫감이 많을 텐데, 세탁기와 건조기가 작아서 매일 돌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고. 제인은 고맙게도 자기네 집 대용량 세탁기, 건조기와 우리 것을 교환해 주었다.

덕분에 요즘에는 일주일에 두 번 빨래를 하고 있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다.


대형 세탁기 건조기.jpg 제인이 바꿔준 대용량 세탁기와 건조기. 고마워,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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