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놀이

여자라는 이름으로...

by 김사임


달뜬 표정의 사내가 밤길을 서둘러 걷는다.

그런 사내 뒤를 숨죽여 따르는 그림자가 있었다.

마을 끝의 모퉁이를 지나 외딴집에서 걸음을 멈춘 사내가 잠시 두리번거리더니

불 꺼진 방으로 스며들었다.

사내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소리 죽여 방문 앞까지 다가갔다.

댓돌 위에 나란히 놓인 신발들을

처연하게 내려다보던 그림자가 몸을 돌렸다.


얼마 후, 마당 한편 짚더미에서 검붉은 연기가 치솟았다.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른 불꽃은 집어삼킬 듯

뜨거운 기세로 붉은 혀를 날름거렸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불꽃을 지켜보던

그림자는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연희아버지는 작은 마을의 이장이었다.

이미 다섯 명의 자식을 거느린 가장이었다.

변변찮은 살림살이에도 그는 매일같이

술을 달고 살았다.

해 질 무렵, 그가 술 마신 날은 온 동네 사람들이 알았다.

술집에서 나오는 순간 노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죽장 짚고 삿갓 쓰고..."


그는 알고 있는 노래들을 신작로가 들썩이도록 쏟아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노래가 들릴 때마다

그러려니 하면서 웃었다.


"아이고, 이장님 또 한 잔 해부렀구먼.. "


연희엄마는 웃을 수가 없었다.

남편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서둘러 자식들을

제 방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오메 징한 거, 느그 아부지 또 고주망태 되붓다.

니들은 언능언능 방에 들어 가. "


그러나 그녀의 수고 따위는 남편의 술주정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우리 새끼들 어디 갔냐? 다 모여라, 이놈들.."


그의 성화에 붙잡혀온 자식들은 공손히 무릎을 꿇고 주사가 끝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내와 자식들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아이들의 발 저림도 아랑곳없이,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지난 일들까지 소환하곤 했다.

아이들이 잔소리로부터 풀려난 뒤에도

연희엄마는 남편의 주정에 밤새 시달려야 했다.



만취한 다음 날 아침, 연희아버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확성기를 타고 마을에 퍼졌다.


"아. 아.. 이장입니다.. 밤새 안녕들 하셨는 게라잉~

오늘 알려드릴 말씀은 거 머시냐...

추곡 수매건에 대해서 말씀을 올릴까 합니다, 에헴... "


동네 주민들은 귀를 쫑긋 세웠지만

연희엄마만은 예외였다.


"밤새 안녕? 염병하고 자빠졌네.

나오는 것도 없음시롱 목청구만 돋구면 뭣혀.

허구헌 날 술만 푸고 워메! 환장하것네.

호랑이도 눈멀었나 벼, 저런 화상 안 잡아가불고....

웬수도 저런 웬수가 없당게. "


푸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거지물을

던지듯이 와락 쏟아부었다.







7살인 연희는 5남매 중 셋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맑은 눈과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하는 짓마저 곰살맞아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했다.

집안에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말거나

연희는 늘 즐거웠다.

날이면 날마다 끝순이와 어울려 놀기에 바빴다.

끝순이네 산택이 오빠는 개구리를 잘 잡았는데 마당에 장작불을 피워 개구리 뒷다리를

구워주면 맛있게 먹었다.

끝순이랑 돌멩이를 곱게 빻아서 소꿉놀이를 하다가 심심하면 고모네 구멍가게에서 놀았다.

동네 처녀 총각들의 집합 장소인 고모네 가게는 언제 가도 즐거웠다.

맛있는 '왔다 껌'도 얻어먹고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발장단도 맞췄다.

그 외에도 철철이 옷 갈아입는 산과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들녘 등

온 마을이 연희의 놀이터였다.




가난한 살림과 아버지의 술주정 외엔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토닥대다가도 이내 둘러앉아 웃던 연희네 집이었다.

취하여 비틀거려도 신문지에 돼지고기와 두부를 싸 들고 왁자지껄한 노래와 함께 귀가하던 연희아버지였다.

술은 좋아하지만 가끔은 가족도 돌아보며

속정도 내비치는 가장이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언제부터인가 술이 아닌 다른 곳에 마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새벽 귀가가 잦아지고, 늦은 귀가는 점차 외박으로 이어졌다.

연희아버지와 연희엄마의 싸움이

잦아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느 날 언니가 주위를 살피더니 연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요즘 아부지가 이상해.

아부지 바람난 거 같은디.."


연희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큰소리로 되물었다.


"언니야, 바람이 뭔디?"


연희의 큰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언니는

답답하다는 듯 작은 머리를 쥐어박았다.


"오메~ 째깐한 것 목소리 보랑께.

이 맹추야, 그런 게 있어. "


"아따 대그빡은 왜 때리냐.. 아프당께."


실눈 뜨고 째려보는 연희를 언니는 딱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됐당께. 이그...."


그 말과 함께 연희만 뒤안에 남겨두고 가버렸다.

언니의 표정을 보면 뭔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지만 어린 연희는 알 길이 없었다.








어느 날 연희엄마와 연희아버지가 날 선 실랑이를 벌였다.


"오늘 나가면 끝장이요. 새끼들 봐서라도

정신 차리시오, 연희아부지!"


"아따, 마을 일 땜시 나간다고 고로코롬

말을 해도 왜 그란다냐?

환장하것네, 이 여편네 땜시! "


연희엄마의 끈질긴 성화를 못 이긴 연희아버지는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연희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잠잠해졌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다음 날 새벽이었다.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에 연희는 잠에서 깨었다.

어떤 여자가 마당에서 아버지를 부르면서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뒤이어 문을 왈칵 열어젖힌 연희 엄마가

마당으로 내려서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니, 누가 이 새벽에 남의 서방을 부르고 지랄이여!

오냐, 이년아 너 오늘 마침 잘 만났당께.

간뎅이가 부어도 유분수제,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났냐? "


그 여자도 지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나서며 뻔뻔하게 맞섰다


"흥! 니 서방?

그래 오늘 누구 서방인지 알아보자 ,이년아.."


두 여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머리채를 붙들고 순식간에 뒤엉켜 나뒹굴었다.

아닌 밤중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연희 아버지도 두 여자의 싸움에 휘말렸다.

셋이 엉켜서 누가 누군지, 누구의 고함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날카로운 고성과 욕설을 깜깜한 새벽하늘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깨어나 그 소란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언니가 입을 삐쭉 내밀면서 말했다.


"저 여자가 아부지 뺏어갈라고 그러는거여. 아주 나쁜 년이랑께."


춥지도 않은 봄날에 연희는 영문도 모른 채

벌벌 떨면서 엉엉 울었다.

지켜보던 동네 사람들이 담 너머에서 수군거렸다.


"아그들만 불쌍하제 뭐시것어..."


저만치 아침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소란스러운 그 밤은 연희의 울음과 함께 지나갔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한 냉기는 여전히 연희네 주변을 감돌았다.


그날 이후, 마부인 경철이아버지가

제주도에 간 사이

경철이엄마가 연희아버지랑 바람났다는

소문이 마을에 퍼졌다.









지루한 여름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걷이가 끝났다.

마당 끝에 볏단이 우두커니 자리를 잡은 늦가을 밤이었다.

연희아버지는 거울 앞에서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희 엄마의 목소리에 날이 퍼렇게 서 있었다.


"또 그년한테 갈라고?

내가 모르는 줄 아시오?

버러지도 밟으면 꿈틀하는디 오늘 또 나가면

당신하고 나는 끝인 게 처신 똑바로 하시오. "


아내의 엄포에 잠시 주춤하던 그는 이내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리더니

소매를 붙잡은 아내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아내의 울부짖음을 뒤로한 그는 잰걸음으로 집을 나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편이 빠져나간 마당을 넋 놓고 바라보던

연희엄마가 눈물을 닦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옷을 주섬주섬 집어 들고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엄마 나갔다 올텐게 니들은 걱정 말고 어여 자 알았제?"


아이들에게 다짐을 받고 빠른 걸음으로 나서는

연희엄마의 표정은 늘 참고 인내하던 평소와는 달랐다. 전에 없던 독기가 서려 있었다.




힁허케 집을 나선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린 연희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엄마의 낯선 표정에 연희의 마음속은 먹구름이 가득 몰려왔다.




연희엄마는 샘터를 지나 달리듯 걸었다.

그녀의 머릿속엔 고생으로 얼룩진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열아홉 어린 나이에, 논 한 마지기도 없는 남자에게 시집와서

허리 질끈 묶고 술주정도 참아내며 살아왔다,

그 힘든 삶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남편이

가족을 저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믿음이 깨어진 자리에 돋아나는 절망의 무게와 분노를 그녀는 감당할 수 없었다.

이젠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불덩이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절망과 분노가 하나로 뒤섞이더니 증오의 불길로 치솟아 올랐다.


'다 끝났어...'


그녀는 울음을 삼키려 입술을 깨물었다.

깨문 입술에 갇힌 울음은 가슴을 피눈물로 적셨다.


그때, 저만치 흐릿한 달빛 아래 휘적거리며

신작로를 걸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분명 연희아버지였다.

순간 걸음이 더 빨라졌다.

그녀의 심장이 두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