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만 보면...

여름날 오빠와 살구 서리

by 김사임


* 전국 공무원 문예대전 수필부문 우수상




아이들과 놀이터에 갔다가 아파트 후문에서 흥에 들떠 외치는 과일장사 목소리에 저절로 발길이 끌렸다.
마침 빛깔도 고운 형형색색의 여름 과일들이 몸단장을 마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줍은 볼처럼 홍조를 띤 복숭아,
노란 줄무늬 골을 뽐내고 있는 참외,
듬직한 장남처럼 의젓하게 자리 잡은 수박.
그 한편에 보일락 말락 하게 소박한 연주황 빛을 내는 과일이 숨어 있었는데, 바로 살구였다.

비로소,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덥석 한 개를 집어 들며

"맛 한 번 볼게요!"

아저씨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치마에 쓱 문질러 한 입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물이 입안에 고이자 나는 눈을 찔끔 감았다.

신 과일을 즐겨 먹지 않는 내가 살구만 보면 이렇듯 좋아하는 것은
살구에 대한 애틋한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오빠가 중3쯤 됐을 시기였다.
엄마가 가꾸시던 텃밭 가로 높은 언덕배기에 자리한 피난민 아저씨 댁이 있었는데,
그 댁의 살구나무가 우리 밭으로 늘어져 누렇게 익은 살구가 몇 알씩 떨어지곤 했다.
아침 일찍 그 살구를 주우러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형제가 많은 우리 집은 아침잠에서 깨어나 어리벙벙하게 앉아 있다가도
살구나무에 생각이 미치면 정신이 퍼뜩 들며 앞다퉈 뛰어나가곤 했었다.

여름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우수수 떨어진 살구를 바가지로 하나 가득 담아 오곤 했는데,
그런 날이면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좋아라 했었다.




무더위가 잔뜩 성이나 연일 진을 치던 어느 여름날...
밭둑 위로 탐스러운 살구는 가지가 찢어질 듯 늘어졌건만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위에 살구는 요지부동 매달려 단 한 알도 떨어지지 않았다.

동생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본 오빠는 그날 밤, 살구 서리를 계획했는데
그 참모로 내가 발탁되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오빠와 나는 작전 수행에 들어갔다.
내 손엔 세숫대야가 들려 있었다.

살구나무 언덕 주변엔 날카로운 철사 줄이 있었고,
나무 밑엔 무시무시한 불독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우린 잔뜩 긴장되어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고, 손바닥은 땀으로 미끈거렸다.

"내가 따서 던질텐게 니가 담아라잉!"

오빠는 낮은 목소리로 당부하고 언덕을 기어 올라갔다.
헌데 낮은 철사 줄 사이를 배로 기어오르던 오빠가

"읔!!!"

외마디 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동시에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
오빠는 미끄러지듯 언덕을 내려와 마구 달리기 시작했고,
영문도 모르는 나는 그저 오빠 꽁무니만 따라 대야를 내동댕이 치고 쫓기듯 줄행랑을 쳤다.

누군가에게 목덜미를 잡힐 것만 같던 긴박감에서 벗어나 가쁜 숨을 돌리며
상황을 살펴보던 나는 그만 배를 움켜쥐고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말았다.

오빠는 철사 줄에 긁히고 옷은 온통 똥물투성이어서 냄새가 진동했다.
낮에 현장 답사를 할 때만 해도 철사 줄과 불독이 방해물이었는데
정보가 누설이라도 된 듯 공교롭게도 인분을 뿌려놓은 모양이었다.




살구 빛깔 똥물만 뒤집어쓰고 개에게 쫓겨 실패로 끝난 살구 서리였지만...

살구만 보면

"픽!!"

웃음이 나오고
긴장감이 감돌던 그날 밤 오빠와의 동지애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비록 예전 느꼈던 살구맛은 아니지만
그때 감질났던 못다 채운 욕구를 채우듯 자꾸만 살구에 손이 간다.

"아저씨, 살구 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