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잉하리 Jul 29. 2021

이해하고 이해되길 바라는 것

엄마, 나  그리고 딸

사람이 숨길 수 없는 세 가지가 기침과 가난, 그리고 사랑이라는 영화 속 대사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스쳐가는 바람에도 얼굴이 붉어졌던 고교시절, 제일 싫었던 시간은 수학 시간도 국어 시간도 아닌 점심시간이 이었다. 수업 시간에 나와 친구들의 모습은 비슷했다. 우리는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책상에 앉아 같은 책으로 공부했다. 거기에는 빈부의 격차가 고개를 내밀 틈이 없었다. 애석하게도 점심시간은 달랐다. 내게서는 가난의 냄새가 풍겼고 그것은 숨겨지지 않았다.


누가 쓰다 물려준 것 같은 후줄근한 도시락 통도 싫었지만 그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은 종종 나를 도망가고 싶게 만들었다. 특히 내가 싫어했던 것은 두부 부침과 김치였다. 그 조합은 최악이었다. 도시락을 여는 순간 빨간 김칫국물이 잔뜩 베인 두부 부침을 보는 것은 곤혹스러움이자 괴로움이었다. 눈길이 가는 친구들의 반찬들을 놔두고 나는 내가 싸온 반찬들을 입에 욱여넣곤 했다. 빨리 먹어서 없애버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였다.  


지난 7월 9일 금요일 코로나가 4단계로 격상되어, 월요일부터 유치원에서 간식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연락을 받았고 월요일 아침 아이 간식 도시락을 챙겼다. 간단한 과일과 음료를 싸주는 것이 전부인데 그것조차도 조금 번거로웠다. 문득 몇 년 동안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야 했던 엄마가 떠올랐다.


1년에 명절 사나흘을 빼고는 늘 일을 했던 엄마, 365일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고 세 아이의 도시락을 준비하시던 엄마. 딸자식을 굶길 수 없어 바쁜 와중 쥐어짜 낸 김치와 두부. 장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시각 10시, 냉장고 속 김치와 두부는 엄마에게 최후의 보루였으리라. 하지만 그것이야 엄마의 사정이었고 철없던 10대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이자 가정형편일 뿐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런 현실에서 가장 도망치고 싶었던 건 바로 엄마였을 것이다.


엄마도 현실 속에서 욕망하는 존재임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아이를 낳고 나서였다. 엄마가 되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놀고 싶었다. 엄마라는 이름표를 달았지만 그 안에 내가 욕망하던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주방을 오가던 두 다리는 얼마나 피곤했을까. 밤 10시 지친 몸으로 돌아온 집. 그곳은 쉼터라기보단 또 다른 일터. 다 큰 딸들이 서로 미루다 쌓아놓은 설거지거리와 엉망으로 어질러 놓은 집 앞에서 엄마는 때론 분노하고 때론 절망하고 때론 도망가고 싶었을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감정이라는 것은 우리 가족 누구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었다. 엄마가 장사를 하고 밥을 짓고 우리를 건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엄마였으므로.


외식과 배달 음식이 일상적인 요즘이지만 엄마가 젊었을 때는 상황이 많이 달랐었다. 넉넉하지 못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더욱 그랬다.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누군가의 생일에나 경양식집에 갔었고 통닭을 사다 먹는 것조차도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이벤트였다. 이제 돌이켜보니 그런 날 가장 설렜을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을 것 같다. 일 년 내내 엄마를 옭아맸던 밥이라는 족쇄를 벗어놓고 자유로울 수 있는 날. 경양식 집에 가서 돈가스를 먹던 날, 아침부터 신났던 작은 소녀만큼이나 상기된 여인의 모습이 이제 내게 선명히 그려진다.

 

40이 넘은 지금도 종종 엄마가 해 주신 밥을 먹는다. 실컷 밥을 차려주신 후에는 피곤하겠다며 얼른 먹고 집에 가라고 재촉하신다.

"내가 좀 치우고 갈게."

"별로 치울 것도 없어. 내가 뭐 할 일이 있다고. 너 집에 가서 할 일이 오죽 많냐?"

"그래? 알았어, 엄마."

몇 시간의 수고스러움을 마다하고 차린 밥상, 또 그 시간만큼 오래 걸릴 뒷정리. 뼛속까지 이기적인 자식은 알면서도 모른 척 자리를 뜬다. 엄마의 감정보다는 나의 안위와 편안함이 여전히 우선이다.


밤 12시가 거의 다 된 시간 잠도 안 자고 내 속을 뒤집어 놓는 10살 딸을 바라본다. 지 엄마는 힘든 줄도 먹고 싶은 줄도 하고 싶은 게 있는 줄도 모른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고 보니 걔나 나나 인간 되려면 멀었다. 가끔 아이에게 '엄마도 입이야, 너만 입인 줄 아니?'라며 한탄 섞인 잔소리를 하곤 한다. 부끄럽게도 내가 먼저 기억해야 할 말이다. 엄마가 많이 늙으셨다는 것, 늙어버린 여자에게도 희로애락이 있다는 것, 인생의 고단함이 있다는 것. 


내가 늦게라도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했듯이 언젠가 내 딸도 자신 앞의 늙은 여자가 한 인간임을 이해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다만 내 딸에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간 도둑을 조심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