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문화를 전한 사명자들 (1)
지금와서 누군가가 자신을 ‘힙합 문화의 전도사’로 칭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에도 ‘힙합’을 위시한 흑인 음악이 대세를 이뤄 대중에게 친숙하게 자리한지 오래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힙합 ‘문화’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논하는 것이 낯선 일이기 때문이다.
음악 장르로서의 힙합이 대한민국 대중음악 산업을 점령한 요즘 ‘힙합 문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열이면 아홉은 힙합을 랩음악과 동의어로 간주하는 대답이 나올 것이다. 가령 스웨그라던지, 디스전이라던지, 사이퍼 등 쇼미더머니를 통해 송출된 (다른 음악 장르에선 보기 어려운) 힙합씬의 특징들이 지목되거나, 아니면 힙합 음악이 대중화된 현상 자체를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안그래도 최근에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도 방영하겠다,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고자 옛날 힙합을 들으면 종종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힙합이 대세가 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농담으로조차 거론되지 않았던ㅡ마치 3.3 혁명 직전에 김택용 승리를 얘기하는 것과 같은ㅡ 시절에 쓰여졌다는 사실이 확 다가오기 때문이다. 물론 초창기에도 메인스트림(당시는 ‘오버그라운드’라고 칭했다)에서 맹활약한 뮤지션들이 있었고 원타임, 지누션, 드렁큰 타이거 등은 차트 1위를 찍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대중에게는 힙합 뮤지션은 비주류 음악을 하는 특이한 존재 정도로 여겨졌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메인스트림 뮤지션들은 자연스럽게 힙합을 대중에 전파하는 위치에 서기도 했다. 그들은 매체에서 “힙합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음악관을 묻거나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던지는 질문이 아닌, 순수하게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와 힙합 문화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묻는 말이었다. 물론 뮤지션 스스로도 힙합 문화 대중화라는 사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오늘날 힙합의 호황은 과거의 뮤지션들이 분투하며 일군 그 토양 위에 서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여기서 놓쳐서 안 되는 특징은, 힙합의 뒤에는 ‘문화’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따라붙어 합성어를 이뤘다는 점이다. 언더와 오버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힙합이라는 음악 장르만을 궁금해하지 않고 힙합이라는 문화를 궁금해했고, 뮤지션들은 힙합 음악만을 알리는 게 아니라 힙합 문화를 전파하는 사명을 가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이 문화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했다. 물론 힙합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미 본토(미국)에서 나름대로 정립이 된 상태였다. 가장 통속적으로 알려진 정의는, 소위 ‘힙합의 4대 요소’, MC, DJ, B-Boy, Tagger였다. 다시 말하면, 랩, 사운드, 춤, 그래피티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이 힙합의 4대 요소ㅡ가끔 그래피티는 빠졌지만ㅡ를 언급하는 곡이 많았다. 힙합 뮤지션들은 말 그대로 "힙합 초급반"의 선생님이 되었다. (물론 음악 요소에 해당하는 MC와 DJ만을 언급하는 가사는 더더욱 많았다.)
“자, 힙합에는 네 가지 요소가 있다는 거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시죠.”
DJ Wreckx - ‘정직한 DJ’ (2001) *엠넷 <힙합 더 바이브> 진행자 김영원의 목소리 샘플
“MC 결코 조잡한 상술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 배합금기 약재
DJ 결코 조잡한 상술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 배합금기 약재
B-Boy 결코 조잡한 상술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 배합금기 약재
Graffiti 결코 조잡한 상술에 지배되지 않는 절대 배합금기 약재”
Da Crew - ‘힙합 인간형’ (2000)
“DJ들은 있는데 LP는 없고 MC들은 많은데 Club 역시 없어
B-boy들은 다행히 연습실이 있지만 락카는 있어도 다들 깡은 없어
균형이 안맞으니 저울이 소용없던 거지 이 4가지 하나로 만들어야 하지
DJ, MC, B-Boy와 Graffiti”
Ill Skillz Feat. DJ Soulscape - ‘떠버리 삼형제와 판돌이 박박’ (2001) 위 라이브 영상의 DJ는 DJ Smood
“B-boy to the girls 멈추지마
클럽에 있는 dj들도 멈추지마
낙서쟁이들도 멈추지마
D.C and Kekoa 멈추지 않아”
Da Crew & Leo Kekoa - ‘힙합 초급반’ (2001)
“디제이가 만들어낸 힙합. 엠씨가 만들어낸 힙합.
비보이가 만들어낸 힙합. 태거가 만들어낸 힙합.
디제이가 비보이가 엠씨가 만들어낸 힙합 이야기책 위에
그림을 수놓아 깡통을 흔들어”
Deegie - ‘힙합 리듬에 맞춰’ (2002) *앨범에는 Hidden Track으로 실림
“DJ 따라 리듬에 맞춰 다 판을 문질러
MC 따라 리듬에 맞춰 다 힙합을 외쳐 (힙합!)
B-boy따라 리듬에 맞춰 다같이 춤을 쳐 (우 우)
우릴 따라 리듬에 맞춰 다같이 손뼉 쳐”
45RPM - ‘즐거운 생활’ (2002) *엠넷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방영분 (2:41부터)
“어둠 속을 헤매이는 DJ는 형제 잃은 어린 철새가 때 이른 계절의 발에 채이듯 떠도는구나”
“울고 있는 B-Boy는 갈 길을 잃고 이른 평화를 즐기고 있는 거리의 목을 조이듯 자신을 뒤흔든다.”
“설움이 넘쳐 고이는 분노 위를 걷고 있는 MC들은 말하라”
“Tagger들은 모두 기록하라 진짜들이 지금 펼치는 잔치를 모두 기억하라”
P-Type - ‘힙합다운 힙합’ (2004)
"힙합 문화라는 것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고, 그 중에 저희는 힙합 음악이라는 하나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힙합이라는 문화 자체가 매력이지요.”
힙합플레이야 Side-B 인터뷰 중 (2001)
우리나라에 힙합 문화가 산발적으로 막 전파되기 시작할 때만 해도 클럽을 중심으로 춤과 디제잉이 먼저 우위를 점했다. <문 나이트> 클럽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이, 현진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힙합 계보를 뜯어보면 랩 실력보다는 춤 실력에 우선을 두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음악을 돌려주는 DJ들이 있었다. 90년대 초반이 되자 그 B-Boy들과 DJ들이 팀을 이루고, 랩을 가미한 댄스 음악을 앞세워 방송에 데뷔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음악은 러프하게 댄스라고 통칭하지만, 미디어에 의해서 ‘힙합’이라고 명명되기도 했다. 장르를 세분화하자면 뉴잭스윙에 가까웠기에 힙합과 형제 관계를 이루지만, 이들이 힙합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이유는 이 음악들은 한국에 막 씨를 뿌린 ‘힙합 문화’에 의해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가요 팬들에게는 ‘랩’이라는 도구가 힙합 문화의 일원으로 각인되며, 현진영과 듀스가 힙합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특히 듀스는 랩과 안무뿐 아니라 패션까지 힙합 문화의 한 갈래로 여겨지게끔 했다. 김성재가 직접 의상과 스타일을 지휘하며 음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힙합의 겉모습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90년대 후반 PC 통신과 클럽 마스터플랜 등을 중심으로 언더그라운드 씬이 형성되면서 춤보다는 랩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세션 DJ의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했는데, MC와 DJ가 팀을 이루거나(가리온, 사이드비 등. 아시다시피 이후 에픽하이도 같은 형태였다), 크루 안에 DJ를 포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음반 제작에 있어서도 DJ의 위상이 지금보다 훨씬 드높았는데, 스크래칭이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리스너들의 관심을 끌었다. 힙합 세션 DJ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DJ 렉스는 한국 힙합 역사상 가장 큰 문화 충격을 가져다 준 트랙 중 하나인 ‘태어나서 처음’을 비롯해, 다른 가수의 앨범에 솔로 디제잉 트랙을 수록하거나, 디제잉으로 비트를 연주한 트랙을 선보이기도 했다.
언더그라운드 씬이 태동기를 맞이할 때쯤 비보이는 독자적으로 도약하는 시기를 갖는데, 바로 만화가 김수용의 <힙합>이 인기를 끌면서이다. 이 시기 학교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춤 좀 춘다는 친구들이 복도에서 각종 비보이 스킬을 뽐내는 문화가 생겨났다. <힙합>은 만화책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 제작까지 타진되었지만, 티저만 제작되고 접히고 말았다. 그러나 애니메이션 OST로 예정되었던 트랙은 다행히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바로 이현도의 솔로 3집 <완전힙합> 앨범에 실린 ‘힙합’이라는 트랙이다.
“D.Jayin, B boy breakin beats and graffiti
힙합의 뿌리 그 위엔 우리들의 poetry” (진원’s verse)
“자! 고개만이 아닌 목만이 아닌 너의 등 전체로 춤을 출 수 있는 박자 rhythm
그리고 자신만의 각운 속의 ism 작은 하나의 wisdom
현란한 DJ showdown 속 flow Artism
모든게 하나가 되어 빛어내는 순간 속의 awesome”
D.O 이현도 Feat. 진원, Kaos, Jed, Infinite - ‘힙합’ (2000)
의외로 이현도는 이 앨범(2000년) 전까지 힙합 앨범을 발매한 적이 없었는데, 그것은 이현도가 본인의 정체성을 랩퍼에 두기보다는 흑인음악에 기반을 둔 종합적인 프로듀서에 두었기 때문이었다. 듀스 해체 이후 이현도의 행보는 자신의 앨범에서는 실험성 짙은 음악을 하고, 다른 뮤지션들에게는 히트곡을 주는 식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힙합 앨범을 한번은 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있었고, 특히나 자신이 프로덕션을 주도하면서도 다양한 피처링진을 대동해 이들이 이름을 알릴 수 있도록 하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진원(현재의 마스타 우)과 라이머가 이 앨범을 통해 단번에 주목받는 신인이 되었고, 마스터플랜 뮤지션들도 참여했다. 힙합 음악의 다양성을 보여주기 위해 라이브로 녹음된 비트박스 및 프리스타일, 디제잉 트랙을 싣는 등 구성에도 신경을 쓴 앨범이다. 이 앨범을 끝으로 이현도는 자신의 목소리가 주도하는 앨범을 더이상 발매하지 않았다.
* 다음 편은 '자유'라는 키워드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