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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인트의 책 이야기 Jan 01. 2021

장제스에 대한 새로운 평가



【 중일전쟁 】- 역사가 망각한 그들 1937~1945   

    _래너 미터 / 글항아리 


“장제스에 대한 새로운 평가”


“우리에게 항일은 당을 발전시킬 수 있는 호기다. 역량의 70퍼센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데 쓰고, 20퍼센트는 국민당을 상대하는 데, 10퍼센트는 항일에 써야한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마오쩌둥이 팔로군의 출동을 앞둔 산시성 뤄촨(洛川)서 열린 비밀 간부회의에서 한 말이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생각이 한국전쟁에도 적용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국과 일본의 분쟁은 193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닌, 그로부터 한참을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부터 중국과 일본은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었었다는 분석도 있다. 그 당시 분열되고 군벌화된 중국은 내부적으로 심각한 상태에 처하게 된다. 군벌화와 중앙정부의 통제력 상실은 청의 마지막 50년 통치 동안 중국을 뒤흔든 광범위한 폭력문화를 초래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은 “외국 악마들이 모두 죽으면, 큰비가 내릴 것이다” 따위의 선동적인 구호로 가뭄에 시달리는 지역 주민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가뭄과 기근은 지방의 폭력 사태를 더욱 부추겼다.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 이 유약한 시대에 장제스가 태어났다. 장제스는 젊은 시절부터 중국이 다시 통일되어야 하고, 중국에서 제국주의 세력을 근절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군사적, 정치적 삶을 바쳤다. 이 책의 저자 래너 미터는 인도출신 영국 역사학자로 중국현대사를 전공했다. 저자는 『중일전쟁』을 통해 국민당의 장제스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 있다.


이 무렵 일본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일본은 19세기 말 강력한 근대 민족국가인 제국의 길로 나아갔다. 1894~1895년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격돌했다. 일본은 조선뿐만 아니라 타이완의 지배권도 주장했다. 더욱 욕심이 난 일본은 러시아가 이미 식민지로 만든 만주의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러일전쟁을 벌인다. 8만 명의 일본 병력이 부상과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전술적인 면에서 앞섰던 일본이 러시아의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일본 관동군은 만주에 주둔하면서 점차 병력을 늘려나갔다. 최초 1만 명에서 편성된 이 부대는 1933년에는 11만 4000명까지 증원된다. 당연히 일본은 중국에 큰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된다. 1931년 9월 18일, 선양(沈陽, 만주 서부에 있는 이 도시는 당시에는 평톈奉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부근의 철로에서 폭탄이 터졌다. 1905년부터 이곳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은 폭파가 중국 반일분자들의 소행이며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선언했다. 실제로는 폭발물을 터뜨린 장본인은 일본군이었다.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일본군의 비열한 행위였다. 일을 벌린 관동군 장교 두 사람은 심지어 도쿄의 민간 정부에 보고조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작전 개시 일주일 만에 일본은 프랑스와 독일을 합한 만큼의 영토를 점령했다. 3000만 명의 인구가 그들의 지배아래 들어갔다. 


이 사건 이후 몇 년이 흘러 1937년 여름, 베이징 중심가에서 1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평범한 마을 완핑에서 다시 전쟁의 불씨가 살아났다.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중 하나”라고 극찬한 루거우챠오(蘆溝橋)주변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중일 전쟁은 장장 8년을 끌게 된다. 




전쟁 내내 장제스는 안전한 후방(충칭)에 머물면서 일본군이 알아서 물러나기만을 기다렸던 것이 아니라 치열한 외교전으로 열강들을 중국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했다. 아울러 지속적으로 일본을 향해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소련의 대규모 군사원조를 통해 그동안의 손실을 어느 정도 회복한 중국군은 만주 노몬한 전투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 대패하자 형세를 역전시킬 기회를 얻었다면서 1939년 12월에는 무려 100만 명의 병력으로 전면적인 반격에 나서기도 했다.


그 동안 마오쩌둥은 무엇을 하고 있었나? 대일항전 내내 몇 차례 폭격을 받은 것 외에 일본군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았던 옌안(마오쩌둥의 공산당 근거지)은 가장 안전한 도시 중 하나였다. 수시로 최일선을 돌아보았던 장제스-쑹메이링과 달리 마오쩌둥은 8년 항전 내내 단 한 번도 옌안의 동굴을 나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에게 패하고 도시를 빼앗겼다는 소식이 들리면 기쁨의 환호성을 내며 좋아했었다고 한다. 만약 공산당이 항일의 주체였고 일본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면 옌안은 결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일본군이 우한을 접수한 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주력은 우한에 집중되었으며 화중과 화난에서 국민정부군과 치열한 일진일퇴를 벌였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핵심 간부들 중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2차 국공합작으로 장제스 정권은 공산군을 국민정부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여단장급 이상 간부 31명에게 소장 이상의 계급을 부여했다. 그중 5명이 항전기간에 죽었다. 그러나 실제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람은 팔로군 참모장이었던 줘치안 한 사람뿐이었다. 이는 상장급(대장) 10명을 비롯해 집단군 사령관 2명, 군단장 7명, 사단장 22명 등 무려 200여 명에 달하는 고위 장성이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국민정부군과는 대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항일전쟁사는 국공내전에서 장제스가 패배하고 냉전의 복잡한 정치적 역학 구도아래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역사는 힘 있는 자에 의해 쓰여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마오쩌둥을 우두머리로 한 중국공산당은 정권을 잡은 후에도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국내에 소개 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을 다룬 여러 책에서도 장제스의 이미지는 별로 좋지 못하다. 장제스의 독단적인 결정, 판단 미스, 국민당 고위급들의 부정부패, 민심 상실 등등의 여러 논점들은 허위는 아니지만, 공산당의 부풀린 작품이기도 하다. 중국공산당 역시 이러한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원제는「Forgotten Ally: China's War with Japan, 1937~1945」이다. 번역과정에서 Forgotten Ally는 ‘역사가 망각한 그들’이라고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그들’은 중일전쟁에서 무한 희생을 치룬 장제스와 국민정부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중국공산당의 과거를 통해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본다면 너무 앞서가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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