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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교회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이유

평일에는 회사원, 주말에는 목사님

by 나의해방일지
사진출처 : 최주광 목사의 <텐트메이커>


"내가 이러려고 OO이 됐나?"


고된 현실 속에서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질문이다. 나에게도 그런 질문이 찾아온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내가 이러려고 목사가 되었나?'


완벽한 직업이 어디 있으랴. 아무리 인기 직종이라도, 아무리 신중한 고민 끝에 결정한 직업이라도, 막상 그 일을 하다 보면 이상과 다른 현실을 마주하곤 실망하게 되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쉽게 자기 일을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그 업(業)을 통해서 어찌 됐든 '먹고살 수 있다'는 숭고한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밥은 숭고하다.)


그런데 나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더 숭고한 것이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람과 자긍심’ 같은 것이었다. 비록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돈을 잘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이라도, 거기서 그런 가치를 찾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리라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막상 목회현장에 나가보니 전도사, 목사가 하는 일이 기대했던 만큼 숭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목회를 '성직'이라 하는데, 당시에는 내가 교회에서 하는 일이 거룩하기는커녕, 그저 먹고살기 위해서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로만 느껴졌다. 게다가 그 서비스 제공의 대가로는, 도저히 먹고살 수가 없었다. 당시에 난 서울에서 전도사로 일하며 140만 원의 사례비를 받았는데, 그렇게 2년을 입에 풀칠하며 살다 보니 속된 말로 '현타'가 왔다. 먹고사는 것보다 더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여기까지 왔는데, 막상 내가 찾던 이상향은 여기엔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고 먹고사는 것 마저도 녹록지 않다 보니 결국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사실은 그저 '현타'만 온 게 아니었다. 당시 이혼하고 혼자 살고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급성심부전으로 응급실에 입원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나는 대학시절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활비를 근근이 벌며 살아왔고, 졸업한 후에도 교회에서 한 달에 140만 원을 받으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수중에 모아놓은 돈이 없었다.


"아버지 심장 기능이 일반인의 15% 정도로 많이 떨어져 있어요.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당장 수술을 하셔야 합니다."


의사가 보호자인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의사에게 당장 수술을 해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천만 원이 넘는 수술비를 당시에 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꼴랑 돈 천만 원 때문에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수술을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비참하게 느껴졌다.


‘하, 나이 서른이 넘도록 난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그동안 목회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10년 가까이 신념을 쫓아 살아왔던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신념으로 누구를 구원하겠단 말인가. 지금 나에게 구원은 아버지를 치료할 수 있는 돈이다.’


그렇게 나는 5년간 사역하던 교회를 그만두고 오직 ‘돈’을 벌기 위해 무작정 사회로 뛰어들었다. 처음엔 카카오 대리기사로 등록을 하고 대리운전을 하러 다녔다. 낮에는 틈틈이 단기 공장알바 같은 것도 해보았다. 그러면서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올리고 어디든 취직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녔다. 나이 서른이 넘어서 신학전공과 전도사 경력으로 구할 수 있는 직장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업체로부터 입사 제안을 받게 되었는데, 그곳은 사람들 앞에서 보험상품을 소개하고 계약을 주선하는 일을 하는 곳이었다. 영업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딱히 대안이 없기도 했고 종교와 보험영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보험을 팔러 다녔다. 각오는 하고 시작했지만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슬슬 다른 일을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이번에는 매장에서 보험상담을 하는 정규직 매니저를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이거라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입사신청을 했고, 잠깐이었지만 보험영업을 했던 이력을 살려 당당히 최종 면접에 합격했다. 6개월 수습기간 동안 어느 정도 실적을 내야 정규직으로 정식계약을 할 수 있었는데, 다행히 좋은 성과를 거두고 수습기간도 잘 통과할 수 있었다. 아마도 교회에서 사람들을 상대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하던(설교) 경험이 있다 보니 남들보다 금방 업무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본사 스텝으로 직군 전환을 할 기회가 생겨서, 영업직이 아니라 사무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교회를 그만두고 불과 1년이 조금 지나 생긴 일이다.


나는 처음에 사회생활에 뛰어들면서, 나름의 목표가 있었다. 무슨 일을 하던 월 300만 원 이상을 벌어보자는 것이었다. 그 목표는 이 악물고 열심히 일하면서, 몇 번 이직을 했더니 3년 만에 이룰 수 있었다. 난 그저 교회에서 하던 대로 회사에서도 일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태도가 좋다며 다들 좋게 평가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 수술비도 잘 해결할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해결했으니, 이젠 내가 진짜 하고 싶던걸 해보자’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난 후엔 내가 정말 원하던 삶은 무엇이었나를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목회를 통해 찾고 싶었던 것은 의미였다. 목사가 되면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주고 싶었고, 그게 그의 삶에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이젠 내 힘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되었으니, 교인들의 자비심(헌금)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고 낡은 교회의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날 수 있다. 처음 목사가 되어야겠다 생각했을 때 거기서 찾고 싶었던 의미를, 이젠 나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회사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사역을 병행하고 있고, 작년에는 마침내 목사 안수도 받았다. 비로소 목사이자 회사원이기도 한 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목사는 자고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한다. 그걸 종교인들은 '진리'라고도 하고 '복음'이라고도 한다. 나는 그런 종교적인 구호를 넘어서 누군가에게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고 싶다. 그게 진정한 '구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열정이 넘치는 목사다. 하지만 나에겐 교회도 없고 교인도 없다. 아직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이 글쓰기다. 글은 내가 죽어도 어딘가에 남아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누군가에게 내 생각을 전달해 줄 테니까.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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