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보이는 것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마음을 지키라 (잠 4:23)

by 나의해방일지

너무 힘들면 여유를 갖기 힘들다. 시야가 좁아지고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모든 생각이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나를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특히 살면서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했거나,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에게 버림받고 상처를 받았다면, 더더욱 마음의 여유를 갖기가 어렵다. 그 아픔이 내 가슴 깊숙이 남아, 인간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정이 생기고 세상만사가 다 싫어진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한 때 날카로운 사람이었고, 비관주의자였다. 학창 시절 부모님의 이혼을 겪었고 존경하며 따르던 목사에게 상처받기도 했다. 나 또한 결혼 후 아내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하게 되었다. 사는 게 힘들고 괴로웠다. 사람이 싫고 미웠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통스럽고 아픈 일이어도, 시간이 지나고 익숙해지면 다시 살만해진다. 물론, 그걸 받아들이기까지는 정말 고통스럽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나만 그렇게 힘들겠는가. 사는 게 다 그렇다. 오죽했으면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했을까. 나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삶에서 그런 아픔과 고통을 겪을 때마다 이 아픔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그런 질문 끝에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내 삶에 주어지는 고통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신은 나에게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라는 걸 주었다는 점이다.


불행한 일을 겪었다고 해서 꼭 불행하게 살아야 하나?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한 상황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 상황을 뛰어넘고 극복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비록 불행한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불행한 존재가 될지, 행복한 존재가 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그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고통과 시련을 딛고 일어난 후에 인간은 이전보다 더 성숙한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타오르는 태양처럼 꺼지지 않는 희망이고, 솟아나는 가능성이다. 나는 비록 실패하고 넘어졌지만, 여전히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한다. 그래서 나는 선택하기로 했다. 마음에 여유를 갖기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그제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나는 출근길에 '01A' 남산순환버스를 탄다. 집에서 회사(시청역)까지 지하철을 타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람이 붐비는 출근시간 지하철을 피해 남산 풍경을 보는 여유를 갖고 싶어서다. 01A 버스를 타면 남산 숲 길을 지나 정상까지 올라가서 서울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다. 높은 곳에서 도심 풍경을 바라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저 조그만 콘크리트 덩어리 안에서, 나는 뭘 그렇게 아등바등하고 있나...'


버스에 앉아 창문을 통해 보는 세상은 질서 정연하고 따듯하다. 혼란스럽고 차가운 내 경험을, 창 밖을 바라보면서 조금씩 덜어낼 수 있다. 출근길에 만나는 버스기사님 중에는 가끔 나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분도 있고, 길가를 걷는 사람들 중엔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아침 산책을 하는 할머니도 있다. 종종 버스를 놓칠까 봐 정거장까지 전력질주를 하며 열심히 하루를 시작하는 젊은이도 볼 수 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위로와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 버스에 나이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두 분이 타신 적이 있다. 아침 일찍 남산 구경을 하러 나오신 듯했다. 두 분은 친구사이인 것 같았는데, 그중 한 분이 버스 뒷바퀴 위쪽 높은 좌석에 앉자고 하셨다. 다른 한 분이 무릎이 아프다며 뭣하러 그런 불편한 자리에 앉느냐고 하자, 할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다.


"에이~ 그러지 말고, 와서 앉아봐. 여기 앉으면 풍경이 훤히 잘 보이고 좋아."


무릎이 아프다던 할아버지도 그 좌석에 함께 앉으시더니 남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금세 즐거운 대화를 나누셨다. 할아버지 두 분의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인생의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버스 뒷 자석, 바퀴 위에 놓인 그 자리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리'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 자리가 불편한 자리, 어떤 사람에게는 풍경이 잘 보이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 내가 매일 아침마다 타는 이 버스도, 어떤 이에게는 평생 한 번 서울에 놀러 와야 타볼 수 있는 특별한 버스일 수 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에 대해서 소중히 여기고, 내게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하여 욕심을 버리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지금 여기, 행복을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노력이나 결심 따위가 아니라, 그저 작은 여유다.


성경에 잠언이라는 책이 있다. 솔로몬의 지혜가 담겨 있는 이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 솔로몬이 이야기한 마음을 지킨다는 건 이런 게 아닐까. 내 안에 욕심을 내려놓고, 두렵고 불안한 마음도 잠시 진정시키고, 잠시 여유를 갖는 것 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목사가 교회 그만두고 회사원이 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