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행성]고추 익어가는 무렵에

9월 8일 - 오늘의 삶그림

by 유이지유

[소행성]고추 익어가는 무렵에



볕 좋은 마당, 거적 위에 몸을 누인 고추들이 토닥토닥 몸을 꼬아댄다.


봄날, 손톱의 하얀 반달보다 작은 씨앗에서 싹을 틔운 모종이 일렬종대로 밭을 일군다.

몸이 커질 대로 커진 대궁에서 소복한 꽃망울을 피워낸다.

또 얼마 안가서는 그 하얀 화관에서 민망할 정도로 작은 푸른 것들이 자라나온다.

화관을 벗어던지고야 무럭무럭 자라 ‘풋고추’라 불리게 되었다.

한 가지에서 경쟁하듯 톡톡 자라나더니 누가 이기나 경쟁을 하며 쭉쭉 제 몸을 뻗어댄다.

시들한 녀석은 곧 떨어졌고, 웃 된 녀석도 견디지 못한 가지가 놓아버렸다.

시기적절하지 않은 것들이 견뎌내기엔 녹녹치 않은 세계이다.


풋고추들이 때를 맞춰가며 여름 내내 제 몸을 불려댔다.

불릴 만큼 불린 녀석들은 불어난 제 몸이 자랑스러워 얼굴을 물들였다.

볼이 빨개지더니 종내는 엉덩이 끝까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꼭지까지 붉어진 녀석들은 조바심을 태우듯 새빨개져 ‘홍고추’로서의 제 몸의 자태를 뽐냈다.

어서 와 제 몸을 따 주기를-.


주인이 손길보다 행여나 먼저 떨어지지 않을까 하나둘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때를 맞춘 주인이 상처라도 날까 가지 끝에서 똑하고 녀석들을 떼어내 준다.

그제야 녀석들은 '고추'라는 보통명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녀석들의 여정이 여기서 끝이 날까?


저를 낳아준 가지와 밭을 떠나 세상으로 나온 녀석들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볕 좋은 날에 거적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벌레에 먹히고, 새들에게 옆구리를 쪼이고, 비바람에 날려 거적 밖으로 밀려나서도 안 되고, 햇살에 너무 익어서 곰보자국이 나거나 또 너무 허예져서도 안 된다.

쓸모를 없게 만드는 방해거리들로부터 이겨내야 한다.

쓸모 있어지기 위해서는 제 노력만으로는 부족해서 주인의 정성과 수고스러움이 보태져야 한다.

이곳도 때를 알고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 없이는 해쳐나가기엔 녹녹치 않은 세상이다.


볕이 좋을 때 이불 위로 나와 해님과 토닥거리다가

어둑해질 무렵에는 거적 이불을 잘 덮고 이슬을 피하기를 여러 날…

물기를 쥐어 째내고 남길 것만을 남기고 나서야 가까스로 여정의 끝자락에 도달하는 것이다.




푸르던 나뭇잎도 한두 잎 제 몸의 색을 바꾸고 팔랑거리며 지상으로의 여정을 시작한다.

몸을 다 말린 녀석들과 나뭇잎이 마당에서 인사를 나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여정을 기약하며 잠시 같은 거적 위에서 토닥토닥! 바스락바르락! 수다를 떤다.


곧 가루가 되어 흩어질 녀석들이

볕 속에서 마지막 여정을 위해 빨갛게 빛나고 있다.



고추 익어가는 토닥거림과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마당에 앉아

높아진 하늘 끝에 걸린 구름을 흩으러 보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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