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단편] 운명

by 유이지유

운명

그녀를 떠올릴 어떤 기색도 없지만,

몇 백 분의 몇 초 사이의 순간에도 그녀를 떠올렸다.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도 항상 그녀를 향한 공백이 남겨져 있었다.

생사가 요동치는 피바람 속에도,

안온하기 그지없는 풍경 속에도 늘 그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처럼 잠시의 안온을 맛보는 순간에도

그녀를 여지없이 나의 마음에 담아 놓는다.



*
푸르름이 묻어나는 여름 하늘이 찬란히 부서지는 오늘 같은 오후,


탄도처럼 부서져 사방으로 부서지는 찬란한 태양에 목마른 자여,


작렬하는 태양 아래 가버린 그대의 모습 서러워 눈물짓는 내가 있구나.


눈 먼 자인 나는 그대 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다.


그 빛에 이미 눈이 멀어 더는 그 어떤 것도 내 눈에 담을 수가 없다.


*



시작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

다가온 운명을 운명이라 인정하지 못 하지!

운명임을 깨닫는 순간에 조차 상실할 것들이 두려워 도망치기 급급하다.


*
어느 시공이든 모든 것이 존재하고

모든 것이 상실된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여.


그대의 운명은 이미 시작됐다네.

그대가 그대이기도 전에 이미,

그녀가 그녀이기도 전에 이미.
태초에 빛이 있듯이-.

*





광막한 나의 세계는 그대로 인해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

단 한 줄의 빛이 나를 저 너머로 인도하고 있다.

집어삼키는 심연과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세상,

심연에 집어삼켜지는 공포에 떨리는 매 순간 매 순간을 지탱하는 것은 그대로 인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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