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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지유 Sep 04. 2022

[단상단편] 아빠와 밥솥

2022년 9월 4일

[단상단편] 아빠와 밥솥


얼마 전 팔순을 맞이한 민모 씨는 세상 겁날 게 없었다. 왜냐면 자기보다도 나이 어린데, 밥벌이는커녕 거동도 제대로 못 하고 동네 밖으로는 나갈 생각도 못 하는 이들이 우후죽순이었다. 식구들이 챙겨주는 삼시 세끼만 기다리며 방구들을 지고 있는 이들 욕해대는 게 민모 씨의 특기라면 특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민모 씨는 오늘도 5시에 SUV 자가용을 끌고 45KM 떨어진 여주 밭으로 농사일을 나갔다 왔다. 집 근처의 오른 땅을 팔아 저렴하지만 비옥한 배나 큰 땅을 또 구매했다. 2년간 직접 경작을 해야 세금 감면을 받는다. 눈 가리고 아웅 정도로 하라는 식구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제 버릇은 못 주는 법이었다.

평생 해온 농사라 한 평 땅 빈틈없이 작물을 심어댔다. 농사 그만 지으라고 땅 팔게 한 자식들 말은 뒷전, 일을 배로 늘렸다.


땅은 집에서 왕복 두 시간이나 걸리는 지방에 있었다.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다시 버스 타거나 택시를 타야 했다. 몇 번 그렇게 다니다가 또 일을 치고 말았다. 식구들 모르게 또 차를 질렀다.

자잘한 교통사고가 여러 번, 그러다 몇 년 전 떨어진 인지력에 뺑소니 사고까지 냈던 민모 씨였다. 더 큰 일내기 전에 차 없애라는 자식들 성화에 결국 폐차시켰는데, 농사를 지으려니 차 없이 안 되겠다 싶었다.


처음에 나름 눈치가 보였다. 사고를 낼 때마다 뒤처리하느라 짜증 만땅인 둘째 딸에게 운전자 노릇을 시키곤 했다. 장거리나 여행 갈 때는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여주 밭은 이젠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 새벽 일찍 움직이면 차도 없어서 겁날 게 없었다.

맨날 다니는 길에서 속도위반, 신호 위반 딱지를 띈다고 욕을 먹긴 해도 그게 대순가? 무슨 큰 사고가 나겠는가? 자신이 농사일로 버는 하루 일당이 얼만데 그게 몇 푼이나 한다고 구박해대는지! 억울하기 짝이 없다.


민모 씨는 마누라와 둘째 딸과 살고 있다.

자신을 만나 평생 돈벌이는커녕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사는 여편네와 제 밥벌이도 못 하고 얻쳐 사는 딸년이었다. 능력자 남편과 아버지를 둔 덕에 세상 팔자 좋은 걸 몰라서 그런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기들 놀고먹는 일로 바쁘다.  

동네의 삼식이들 보면 그런 소리 못 할 텐데.

버스도 못 타서 동네 밖에도 못 나가는 위인들이 차고 넘치는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80에도 자가용 끌고 일 다니는 능력자를 모르는 식구들이다.


여편네는 취미 생활인 화투판으로 놀러 갔는지 6시가 넘도록 들어올 생각을 안 하네. 얹혀사는 딸은 변변찮은 몸 관리하러 오늘도 헬스장에 운동하러 갔나 보다. 그러려니 한다. 다 제 삶이 있는 거니까.

근데…

밥이 없다.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을 판인데, 밥솥에 밥 한 톨이 없었다.

넉넉한 살림이라 밥통에 밥 마르는 일이 없는 집인데 밥이 없네. 밥 달라 투정하는 삼식이가 아니다.

없으면 해 먹으면 되지! 내가 어떤 사람인데 밥 하나를 못 하겠는가.

이런 일이 있을 걸 생각해서 둘째 딸이 몇 번이나 성화해서 밥 짓는 연습도 했었다.


먹을 만치 쌀을 씻고, 밥솥에 안쳤다. 밥을 푸려면 손잡이를 풀어야 하는 것처럼 안치려면 돌려 잠그면 되지. 여기까지는 알겠는데…

같은 눈높이로 쭈그리고 앉은 민 씨는 밥솥과 눈싸움을 시작했다. 취사 버튼을 누르려고 찾는 사이 몇 번 깜박이더니 화면이 꺼졌다. 컴컴한 화면을 건드려봐도 조용하기만 했다. 평소에는 -취사를 눌러주세요. 쿠쿠가 맛있는 밥을 짓겠습니다, 맛있는 밥이 다 됐습니다, 밥을 잘 저어주세요.- 등등 잘도 떠들더니만, 사람 가리나? 어디다 대고 무시야, 이놈의 밥솥 새끼!


오기가 차올라 버튼을 돌려보고 두들겨댔다. 말 안 듣는 것에는 매가 최고다. 까짓 고장 나기밖에 더하겠어! 대가리를 두들기고 싸다구를 날려 보고하다가 아는 글씨 하나를 찾았다. 글씨에 불이 켜지자 잽싸게 눌렀다. 뭐였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아무튼 뭔가 누르기는 눌렀고, 밥솥 그림에 빨간 불이 들어오긴 했다. 작동을 시킨 것이다. 뭐가 됐든 포기하지 않고 해내는 자신은 역시 능력자란 자부심이 차올랐다.


근데 얼마나 밥솥과 사투를 벌인 것일까? 자신을 무시하는 밥솥은 무시하고, 가스렌스에 밥을 해야 했나? 그랬으면 벌써 밥 되고도 남았겠구나. 아무튼, 일단은 너무 배고프고 피곤하니 어찌 되나 지켜봐야겠다. 아이고, 배야.


기다리는 동안,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운동을 마치고 온 딸이 싱크대 앞에서 부산스러웠다.

“다 씻고 왔는데 오밤중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투덜대며 밥을 퍼내고 있었다. 딱 봐도 허연 것이 밥이 설었다. 딸은 다시 밥을 안치고 선 밥을 프라이팬에 눌러댔다.

“쌀도 남아도는데… 버려.”

“맨날 버리긴 뭘 버려, 농사꾼이 버리긴 개뿔!”

한마디 했다가 늘 그렇듯 말로 잔소리를 들어 먹었다. 한마디 더 했다가는 어찌 될지 모른다.


밥솥은 칙칙폭폭 잘도 돌아갔다.

집안은 누룽지 냄새로 가득했다.

내일도 새벽같이 밭에 가야 하니 입가심으로 누룽지까지 챙겨 먹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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