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득찬 달 빛 아래]

2025년 오늘의 삶쓰기

by 유이지유

[가득찬 달 빛 아래]


오늘은 2025년 음력 팔월 보름, 추석(秋夕)이다.

'가을 저녁'이라는 한자어 뜻 그대로, 가을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다. 한 해 농사의 결실에 감사하고 조상께 보은 하는 풍요와 화목의 상징한다. 우리말로는 한가위, 즉 '크다(한)'와 '가운데(가위)'가 합쳐진 팔월의 가장 크고 좋은 날을 의미한다. 이름이 주는 넉넉함과 여유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옛말처럼 모든 이가 풍족하고 행복하기를 기원했던 날이다.


하지만 풍요와 축복의 날에도 마음 한 구석이 스산하다. 이 가득 찬 달빛 아래, 내 마음은 풍요보다는 서늘함이 스친다. 달밤이 지나면 필연적으로 혹독한 시기가 다가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추석을 이름처럼 '크고 좋은 날'로 맞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 년간의 땀과 결실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독한 시기를 위한 창고'를 채우지 못했다는 불안과 자책이 몰려오기 때문이다. 내 삶이 쟁여놓은 것은 '낡은 것들'뿐이며, 정작 다가올 겨울을 위한 새롭고 튼튼한 방편을 마련하지 못했다.


'한가위만 같아라'는 옛말은 오히려 '끊임없이 미래를 대비하라'는 경고처럼, 마치 나를 감시하는 전조등처럼 느껴졌다. 풍요의 정점에서조차 오늘을 스산히 느끼는 것은 나만일까?


문득,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이가 떠올랐다.

혹독한 시기의 대비를 위해 여름날을 피땀눈물의 노력으로 보낸 개미와 시원한 그늘 아래서, 놀고먹다 골로 가는 배짱이 이야기.


이야기의 탄생지인 서양에서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고 한다. 현대식 해석에서 베짱이는 예술과 재능의 가치로 인정받는다. 자기 재능을 살려 노래하고 춤추는 삶으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날씨가 온화한 유럽에서 겨울을 준비하지 않아도 얼어 죽지는 않을지 모른다. 서양에서 베짱이가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며 노래할 수 있는 것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로 비유되는 환경 조건과 사회 안전망 때문일 것이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아도 얼어 죽지 않을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물론 성냥팔이 소녀의 예외는 있지만!)


한국에서 '개미와 베짱이'는 새로운 해석이 불가능하다. 일단 환경적 조건이 너무나 극명하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경제적 불황이라는 겨울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 땅에서, 베짱이처럼 살다 간 동사(凍死) 직결이다. 이 땅에서 베짱이로 살겠다는 선언은, 예술에 대한 낭만적 선택이라기보다는 현실에 대한 무모한 도전이자 거의 자살 행위에 가깝다. 모두가 혹독한 시기를 위한 창고를 채우는 데 매달릴 때, 재능을 연마하며 시간을 보낼 여유가 없다. 이곳에서는 철저히 무모함으로 치부된다. 그러니 한국 개미는 뼈 빠지게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강박으로 끌어안고 살아간다. 가진 재능으로 혹독한 시기를 버텨낼 '물질적인 창고'를 채운 극소수의 베짱이도 있겠지만, 그건 또 다른 동화에 불과하다.


'배짱이 신드롬'이 허락되지 않는 이 땅에서,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미의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 닥쳐올 긴 겨울을 준비하는 것에 집착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이 K-개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나는 추석을 추석답게 맞이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일 년간 땀 흘린 결실로 거둬들일 만한 것이 없다. 다가올 겨울을 위해 뭐 하나 제대로 된 것을 쟁여놓지 못했다. 무가치와 무능으로 이어지는 자책이 크다.


스산함에 옷깃을 여몄다. 가득 찬 달을 올려다보며, 이 사회가 요구하는 숙명을 곱씹었다.

끊임없는 대비의 압박과 그에 대한 나의 무능은 나의 삶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삶이고 싶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