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메리셸리>
대학로 뮤지컬에는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만큼 인기 있는 소재라는 뜻이겠지요.
우리는 왜 ‘이야기를 쓰는 이야기’에 끌릴까요? 정신분석가 융은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한 자기 일부를 '그림자'라 불렀습니다. 외면할수록 낯설고 위협적으로 돌아오는 것. 뮤지컬 〈메리셸리〉를 보는 내내, 저는 이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메리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의 작가입니다. 뮤지컬의 등장인물은 메리셸리와 동생 클레어, 남편 퍼시셸리, 영국의 유명한 작가 바이런, 그리고 뱀파이어를 쓴 사람으로 알려진 바이런의 주치의 폴리도리입니다.
메리셸리의 엄마는 유명한 작가이자 여성인권 운동가인 '메리울스턴 크래프트'입니다. 여성에게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1700년대에 <여성의 권리옹호>라는 책을 썼으니 당시 얼마나 거센 비판과 반발에 시달렸는지 상상이 갑니다.
극 중에서 메리의 엄마는 주변으로부터 미쳤다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일찍 돌아가셨지요. 그렇기에 딸 메리는 엄마의 글쓰기 능력, 문학적 감수성을 타고 태어났지만 그 재능을 감추어야 했습니다.
"여자가 무슨 글을 쓴다고.. 여자가 쓴 글을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요...(메리셸리의 대사)"
그러던 중 그 재능을 알아보고 인정해 주고 같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퍼시셸리'지요. 당시 꽤 유명한 시인이자 작가인 그가 메리의 글을 알아보고 그들은 함께 시를 쓰며 사랑의 도피(?)를 합니다(퍼시는 유부남이었습니다). 동생 클레어가 그들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도피 생활은 순탄하지 않습니다. (극 내에서) 퍼시는 메리와 함께 쓴 시를 자기 이름으로 출판했고, 메리가 낳은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습니다. 재산은 고갈되고, 빚에 쫓기는 와중에 퍼시는 메리에게 글쓰기를 종용하고(이용하듯 말이지요)....
심리적으로 밑바닥까지 내려간 순간, 그들은 동생 클레어의 애인 바이런의 별장에 초대받습니다.
그곳에서 당대 유명한 낭만주의자이자 쓰레기(?), 악마(?)로 유명한 바이런과 그의 주치의 폴리도리를 만납니다.
심한 장맛비로 별장에 갇힌 사람들에게 바이런은 각자 자신의 밑바닥을 볼 것을 종용합니다(그들이 드러내는 공포 뒤의 욕망과 추악함과 불안은 그의 글의 원천이 됩니다). 그러면서 공포소설을 쓸 것을 제안하지요.
과연 공포란 무엇일까요?
진짜 두려운 건 삶 속에 있어
모든 두려움 속에는 진짜 나의 욕망이 도사리지...
잠겨진 심연의 문을 열어 두려움은 잠깐일 뿐이야
숨기고픈 진짜 너를 깨워, 가장 추한 모습으로...
바이런넘버 -인생은 공포소설처럼- 중
이제 모든 인물들은 자신만의 공포, 두려움, 욕망과 마주하게 됩니다.
폴리도리는 바이런이라는 이름과 그의 글에 미쳐 그와 동행하지만 결코 바이런과 같은 글을 쓸 수 없습니다. 바이런의 삶을 훔쳐보고 바이런의 글을 흉내 낼뿐 '자신의 글'을 쓰지 못합니다. 항상 바이런을 사랑하고 동경하지만, 동시에 파괴하고 싶은 욕망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바이런의 글은 그 욕망을 들춰냅니다.
그렇기에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려준 목소리' 였지요. 폴리도리가 쓰고 싶은 글은 바로 그런 글이었습니다.
이제 메리셸리를 볼까요?
메리에게도 욕망은 억압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엄마에 대한 동경 역시 억압해야 하는 욕망에 불과하지요(그래서 메리는 엄마의 책을 한 번도 읽지 않았습니다). 억압된 욕망은 꾸준히 메리를 괴롭힙니다. 이에 더해 유부남과의 도피, 아기의 죽음은 메리를 극도의 공포와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태어남, 처음부터 내 의지는 없었던
외로움, 원치 않는 나라는 존재
언어, 허락되지 않았던 거짓말
행복, 너무 멀리 존재하는 공허함
메리셸리의 넘버 -나만의 언어- 중
퍼시는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함을 토로합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아내를 버린 죄책감, 메리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메리의 재능에 대한 질투와 시기,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역시 억압된 욕망이자 두려움이지요.
클레어는 바이런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버림받습니다.
그러던 중 퍼시셸리의 전 부인(혹은 본 부인일까요?)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극은 절정에 치닫습니다.
당면한 현실은 모두를 흔들어 놓습니다.
모두가 욕망과 두려움과 고통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아무도 그것에 직면하지 못합니다.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이런은 끝까지 그들을 몰아붙입니다.
우리는 모두 고통으로 가야만 느낄 수가 있어
끝이 없는 고독과 두려움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될 거야
괴로움을 넘어서면 자유가 있어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곳으로 가
그 심연의 끝 그곳에서 진짜 나를 만나리라
바이런의 넘버 -신이 있다면- 중
두려움을 딛고 현실에 가장 먼저 직면한 사람은 동생 클레어입니다.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클레어는 아이를 지키겠다며 독립을 선언하고 혼자 별장을 떠납니다.
메리는 떠난 클레어가 남긴 엄마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금기(자기만의 글을 쓰는 것)를 마주합니다.
별장을 떠나 퍼시와 글을 쓰던 낡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두려움이 시작된 그곳에서 자기 잉ᆢ기를 씁니다.
그렇게 괴물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을 마주 볼 것
찾았다.
아마도 사람들이 널 괴물이라고 부르겠지. 하지만 난 너를 이렇게 부를게 ,
자유.
난 너를 이렇게 부를래.
생명 아니면 죽음.
고독 아니면 사랑,
언어 아니면 노래,
이제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말해도 괜찮아.
태어남, 처음부터 내 의지였을 선택
외로움, 온전히 사유할 수 있는 시간
언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단 믿음
다른 누군가의 피조물이 아닌
목소리를 가진 단 하나의 창조물.
이건 나의 이야기,
내 안에 있었던 가장 고통스러운 이야기
이건 내 목소리
내가 할 수 있는 내 삶의 이야기
메리셸리 넘버 - 나만의 언어 rep- 중
메리는 내면의 괴물(고통, 두려움, 수치심, 온갖 추악하다고 여겨지는 그 무언가)을 글을 통해 끄집어냅니다. 자신이 억눌렀던,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한 부분과 마주하는 순간.
진짜 자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대중 앞에서 떳떳하게 외칩니다.
"제가 바로 그 괴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괴물을 안고 살아갑니다.
괴물에게는 이름도, 목소리도 없이 억눌린 채 존재하지요.
그 괴물을 가만히 들에다 봐주는 행위,
그 괴물에게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그리고 그 괴물과 함께 내는 목소리.
그 순간 우리는 자유를 찾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마라맛 가득한 극을 다 보고 나면 뭔지 모를 후련함을 느낍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분석가 융을 만날 수 있습니다. 융은 인간이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부분을 ‘그림자’라고 불렀지요.
우리가 그림자를 외면할수록 더 낯설고 위협적인 형태로 마주하게 됩니다.
메리 셸리가 만들어낸 괴물은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자기 자자신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를 마주 보고 그림자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 순간. 그림자는 견딜 수 있는 내가 되는 거지요.
마지막으로...
바이런은 어떨까요?
극에서 바이런은 엄청난 글친놈(글에 미친놈)으로 나옵니다.
그가 글에 집착하는 이유 역시 자신 안의 상처를 글로 표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글을 써도 그 무엇도 해소하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바이런은 다른 사람들의 모든 원초적인 고통을 글감으로 이용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피를 먹고사는 뱀파이어처럼 다른 사람의 욕망을 빨아들여 글을 쓴 인물이지요.
끝까지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끝까지 자신의 그림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은 결국 끝없는 고독과 외로움뿐입니다...
<덧붙임>
폴리도리와 바이런의 얽히고설킨 욕망을 담은 뮤지컬도 있습니다.
지금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더테일 에이프릴풀스> 인데요. 폴리도리의 소설 뱀파이어에 투영된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도 바이런은 존 폴리도리를 가지고 놀면 내면을 끄집어내는 역들을 하지요. 바이런의 이미지는 그런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