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려 해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

by 사이소리

심리학자 존 볼비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 처음 만나는 사람과 맺는 관계가, 이후 우리가 맺는 모든 사랑의 원형이 된다고요. 우리는 흔히 이것을 '애착'이라고 부릅니다.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며, 저는 이 오래된 이론을 두 로봇이 한 편의 극으로 완벽하게 상연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2025년 뮤지컬계의 아카데미 토니상에서 6관왕의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요.

저 역시 볼 때마다 찐한 감동에 울고 나옵니다.


‘우린 왜 사랑했을까…’


지지직 거리는 레코드 소리처럼 극 내내 흘러나오는 이 노래는 극이 끝난 후에도 머릿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해피엔딩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이 태어나고 자라고 성숙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로봇을 통해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고 있는 사랑과 선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극에 대한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처음 배운 사랑 — 안전기지가 되어준 제임스


주인공 올리버는 구식 헬퍼봇입니다. 버려진 헬퍼봇이 사는 아파트에서 옛 주인 제임스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요. 제임스가 남긴 레코드판을 틀고, 재즈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주인을 기다리는 올리버에게 유일한 친구는 화분(HwaBoon)입니다.

제임스는 긴 시간이 흘러도 오지 않습니다. 제임스가 살고 있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올리버는 밤이 되면 우비를 뒤집어쓰고 밖으로 나가 빈병을 모으고, 병을 팔아 동전을 모읍니다.


옆집에 사는 헬퍼봇 클레어는 올리버의 제임스에 대한 사랑이 '프로그램된 것'이라며, 제임스의 마음이 변해버려서 올리버를 버린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올리버는 전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올리버의 기억 속 제임스는 언제나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존재이지요.


제임스는 올리버가 처음 만난 사랑이자, 올리버가 처음 사랑을 배운 대상입니다.

이 관계는 선택이라기보다 처음 주어진 상태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자의적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마주한 관계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이 사랑은 자라나는 삶의 과정 내내 영향을 줍니다. 올리버 역시 이 사랑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처음 사랑과 호의를 배웁니다.



2. 상처받은 애착 — 클레어와 반딧불이


클레어 역시 버려진 헬퍼봇이 사는 아파트에 삽니다. 그녀가 배운 사랑은 고통으로 얼룩져있습니다. 그녀의 주인 부부는 서로를 깊이 사랑했지만, 그 끝에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변했습니다.

클레어에게 사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변할 수 있으며 사랑은 고통을 동반하는 것이지요.


처음부터 클레어가 사랑을 배우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녀 역시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배우고 알고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클레어의 사랑은 주인 부부와 함께 제주도에서 반딧불이를 보았던 기억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이후 사랑에 대한 기억은 고통으로 변질되었지만 그 기억만큼은 훼손되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사랑은 변한다,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녀가 간절히 바란 것은 그 반딧불이를 다시 보는 것입니다.


처음에 받았던 사랑이 변질되고 훼손될지라도 따뜻했던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기 마련입니다. 그 기억은 거친 경험을 살아내다가 문득 내가 돌아가고 싶은 곳, 내가 원하는 사랑의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고장 나 망가져서 언젠가 멈출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클레어가 지금 당장 가고 싶은 곳은 제주도입니다.




이렇게 올리버와 클레어는 의기 투합해서 제주도로 떠납니다.




3. 분리와 탐색 — 방을 떠난다는 것


사랑을 찾으러 가는 길은 현재로부터의 '떠남'을 동반합니다.

우비를 뒤집어쓰지 않고는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올리버는 제임스에게 가기 위해 자신의 방을 떠날 결심을 합니다. 덜덜 떨리는 마음을 부여안고 친구인 화분과 레코드판을 가지고 말입니다. 그리고 늘 자신을 안아주고, 외로워 울 때면 자신을 달래주던 안락한 방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라고 인사합니다.


클레어 역시 자신의 방에게 잘 다녀오겠다고 인사합니다. 설렘과 부푼 마음을 안고 말이지요.


안전하게 여겨지는 사랑에서 벗어나는 길에는 언제나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여 있지요.



떠난다는 건 단순한 이별은 아닙니다. 무언가를 향하는 발걸음이지요.

떨리면서 설레는 마음으로 먼 길을 떠나는 두 사람(아니 로봇).

여행길에 오른 둘에게는 이제 그들만의 '이야기'가 생깁니다.

진짜 이야기도 있고, 그들의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도 있지만 어쨌든 둘 만의 경험은 그들 사이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사랑의 씨앗이 됩니다.



4. 자율적 사랑 — 프로그램되지 않은 선택

올리버는 결국 제임스를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낡은 레코드에서 제임스의 마음을 느낄 뿐이지요.

사랑을 상실한 올리버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은 클레어입니다.


"난 니 도움이 필요해. 화분도 그래"


사실, 클레어의 사랑은 이미 시작되었지요.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 믿으며 피했던 클레어는 올리버와 제임스에게 또 다른 사랑을 배웁니다.


둘은 함께 반딧불이를 구경합니다.

그리고...

'자율적 사랑이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은' 로봇들은 '자율적으로 사랑'에 빠집니다.

이번에는 스스로 선택한 사랑입니다.


무대 위에서 두 로봇이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은 어떠한 언어도 없이 그저 몸짓으로 표현됩니다. 처음 남녀 간의 사랑을 알게 된 그들의 터치 시퀀스는 말 그대로 시작되는 사랑의 몸짓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손끝이 맞닿고

얼굴이 맞닿고

입술이 닿는 순간의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

기쁨과 눈물과 설렘이 뒤섞인 감정.



사랑은 내장된 프로그램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생물학에서, 진화 심리학에서 사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려 하지만 어떠한 과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사랑 아닐까요...



5. 성숙한 사랑 — 고통을 끌어안는 방식


"둘이 아름답게 사랑했답니다"로 끝났다면 이 극은 그저 그냥, 잘 만들어진 예쁜 사랑이야기에 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극이 마지막에 보여주는 것은 고통을 감싸안는 사랑입니다.

풋풋하기만 했던 그들의 사랑은 '성숙된 사랑'으로 나아가지요.


내구성이 약한 헬퍼봇 6인 클레어는 점점 고장 나기 시작합니다. 내구성이 강한 헬퍼봇 5인 올리버의 예측 수명은 훨씬 깁니다. 이별은 정해져 있고, 이 정해진 이별 앞에 남는 감정은 '고통'입니다.


처음 배운 사랑으로 인한 슬픔, 슬픔으로 인한 고통 앞에 힘든 그들은 결국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합니다. 로봇이기에 메모리 초기화가 가능하니까요.


너무 힘든 이별을 겪은 후 우리도 흔히 원합니다.

"그를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는 쉽게 그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러한 고민을 우리는 영화 '이터널선샤인'에서 이미 만났습니다)



올리버는 고통을 끌어안는 방식으로 사랑을 지킵니다. 기억을 지우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써 고통과 사랑을 모두 끌어안는 것이지요.

기억을 지운 척, 올리버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기억을 지운 클레어가 다시 이전처럼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말이지요.


올리버의 방은 고통을 안고 돌아온 올리버를 언제나처럼, 가만히 안아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한 시선이 있습니다.

바로 처음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제임스입니다.

(무대 위에서 제임스는 마치 배경이 된 듯 가만히 올리버를 지켜봅니다)



처음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고,

마침내 사랑에서 고통을 끌어안는 과정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올리버라는 로봇을 통해 이 모든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변합니다. 사라지기도 하고, 고통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누군가에게 손을 내밉니다.

"난 네 도움이 필요해"라고.

어쩌면, 그것이 해피엔딩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