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방영작, 마드리드 모던걸 (Cable Girls) 리뷰
요즘은 OTT 서비스의 메인 페이지에 주체적인 여성 서사를 아예 따로 분류해 놓기도 한다. 비단 OTT 서비스뿐만 아니라 인터넷 서점이나 웹툰 웹소설 같은 인터넷 콘텐츠 시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나 역시 여성 서사로 이루어진 콘텐츠들을 즐긴다. 여성이 주연인 건 물론이고 자신의 인생이나 목표를 위해 막힘 없이 나아가는 스토리를 보고 있자면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인상 깊게 본 여성 주연의 작품들을 리뷰를 통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그렇게 "사랑 따위 내 앞길에 걸림돌" 시리즈를 계속해서 적어볼 예정이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시대물 #스페인어 #스페인배경 #여성서사 #넉넉한시즌 #쫄깃한전개 #야망캐
이 시리즈의 배경은 1차 대전 전후 스페인으로, 이 작품의 영문 제목인 Cable Girls는 그 당시 전화국에서 일하던 여성노동자(교환원)를 의미한다. 지금이야 전화를 거는 즉시 상대방에게 닿을 수 있지만, 전화기가 발명된 직후에는 중간에서 전화를 연결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그걸 전화국이 맡았다. 전국 각지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연결해 돌리는 것이 케이블 걸스의 일이고, 가끔 국가원수들 간의 전화를 연결하는 등 아주 중요한 임무도 도맡는다.
총 5개의 시리즈가 있으며, 한 편당 40~50분 내외로 러닝타임이 좀 긴 편이다.
하지만 몰입감이 최고다.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그리고 배경이 스페인이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이루어져 있는데, 언어가 주는 어감이 매력적인 것도 한몫한다.
리디아는 전화국에 위장 취직하기 위해 신분을 사칭해 시험을 보고 면접을 치른다. 이 길고 긴 파국의 시작이다.
우여곡절 끝에 취직하지만 거기서 자신의 어릴 적 첫사랑을 만난다. 바로 그 전화국 회장의 사위이자 전화국의 이사. 그 첫사랑은 옛 이름을 들먹이며 절절하게 감상에 빠져 리디아를 찾는다. 그 첫사랑은 리디아가 곤란에 처할 때마다 도움을 주지만 리디아는 몇 번이고 뒤통수를 친다.
리디아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연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두 남자를 이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용당하기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이렇게만 보면 그녀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매력적인 점은 자신의 친구들은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리디아의 캐릭터 파악을 덜 했을 땐, 당연히 친구도 이용하는 매정한 인물일 거라 예상했는데, 자기 자신의 약점을 내놓으면서 친구를 감싸는 장면을 보고 그녀의 인간적인 모습에 사로잡혔다. 게다가 명백하게 사랑과 우정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리디아는 우정을 선택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직 사랑이 인생의 전부인 한국식 드라마를 봐온 사람으로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가끔 미드에서나 사랑 이외의 목적을 찾아 움직이는 여자 주인공을 볼 수 있지만, 이제까지 노출된 미디어에서 여자 주인공 = 로맨스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에 더 그렇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리디아의 두 남자, 카를로스와 프란시스코의 비중이 아주 크다. 그 둘과 리디아의 갈등이 이야기의 핵심을 뚫고 지나가는 만큼 로맨스는 중요한 요소다. 리디아가 그 둘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시리즈가 청소년 관람 불가인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디아가 망설임 없이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것은 교환원 친구들이다.
넷의 유대는 전쟁을 방불케 한다. 각자의 상황과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도, 친구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목숨을 내건다. 편견 없이 친구를 받아들이고 신뢰한다. 이 시리즈에서 빠져선 안될 요소이다. 리디아의 친구들인 만큼 다들 내력이 화려하다.
스포일러가 싫다면 아래 박스는 읽지 않아도 좋다.
리디아: 사기꾼, 두 남자 이용
앙헬레스: 가정폭력범인 남편 살인
카를로타: 저 시대에 대놓고 페미니스트, 성소수자
마르가: 가장 순진한 성격이지만, 남자 친구의 쌍둥이 동생과 의도치 않게 바람
넷 다 성격도 성향도 성장배경도 전혀 다르다. 물론 처음부터 리디아를 철석같이 믿었던 건 아니지만,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서로 협동하며 전우애를 다졌다. 우정보단 전우애라고 해야 더 맞는 표현이 될 것 같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는 건 뒤에 있을 시즌이지만 목숨을 걸고 움직이는 리디아와 친구들은 그냥 친구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처연남, 초식남이라는 단어가 있다. 속절없이 흔들리며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 캐릭터를 지칭하는 단어다. 리디아의 남자들은 결코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 외모, 성격 전부 빠지지 않으며 리디아를 위해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배신당한다. 물론 보답을 받기도 한다. 리디아 역시 남자들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카를로스는 전화국 주인의 아들이다. 프란시스코는 전화국의 이사이면서 카를로스의 오랜 친구이자, 동생의 정인이었다. 리디아의 등장으로 그들의 관계 또한 파국을 맞는다.
저 남자들의 헌신적인 행동을 보고 있자면 가슴이 절절하기 그지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만큼 리디아를 사랑하지만 그렇기에 욕망에 이용당한다. 결국은 애증의 관계가 되는데 그래도 그녀를 놓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놀랍게도 두 남자 모두. 그들과 리디아는 서로에게 숙적인 동시에 조력자가 되는데, 이것도 예상을 벗어난 전개였다. 둘의 얽히고설킨 관계가 흥미롭지만 결국은 돌아설 줄 알았다. 둘 중 한 명은 숙적, 한 명은 조력자가 될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다고 단정 짓기에 어려워진다.
이 작품이 인상 깊은 이유는 또 있다.
보통의 드라마들이 재벌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구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동시에, 여자가 남자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는다. 외계인이건 초능력 자건, 아예 한 나라의 왕이건 별반 다르지 않다. 그저 자신이 있던 위치에서 남자를 만나 조금 더 괜찮은 위치에 갈 뿐이다. 하지만 리디아는 다르다. 자신이 원했던 자리에서 남자들을 밀어내고 마음껏 능력을 펼친다. 왕좌로 향하는 길에 놓인 게 사랑이든, 현실이든 온몸으로 부딪힌다. 남자 주인공이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여자 주인공과 함께하는 이야기들은 많지만,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꿰차는 이야기는 많지 않다. 리디아를 야망 캐라고 지칭한 이유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이름 앞에 무력해지는 건 오히려 남자 주인공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디아가 매번 배신만 하는 악역은 아니다.)
미국 자본의 힘이 닿은 콘텐츠라면, 인권과 관련한 대표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특히 넷플릭스 오리지널에서는 자유로운 방식으로 넷플릭스의 정치적 가치관을 드러내는데, 역시 이 작품에서도 그렇다.
우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여성 중심적이다. 리디아라는 인물 자체도 그렇지만, 리디아의 주변 인물 중 하나인 카를로타는 타인이 정한 자신의 인생을 부정하고, 인생에 주권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인물이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 도전하며 세상을 바꾸려고 주도하는 인물이 된다. 다른 주조 연들도 매력적이지만 개인적으로 카를로타가 매력적이라고 느낀 이유다.
게다가 이 작품에서는 성소수자까지 다룬다. 항상 성소수자가 주변 인물로 다뤄지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나마 여기서는 중심인물인 데다 시대에 따른 성소수자들의 고충까지 다루고 있다. 시대는 다르지만 성소수자들의 고충이 현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성소수자들도 겪는 내적, 외적 충돌을 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성적으로 폐쇄적인 한국에서의 성장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더 잘 공감할 것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가, FTM이 고압적인 경찰에게 잡혀 목숨을 위협받던 상황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정당해 고통에 몸부림치던 장면이다.
리디아가 피도 눈물도 없는 야망 캐릭터인 것처럼 묘사했지만, 사실 이 작품에 진정한 악역은 따로 있다. 바로 카를로스의 어머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막장드라마의 시어머니 역할을 톡톡히 하는 인물이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악독하고 지독한 인물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가리지 않으며, 윤리적 도덕적인 기본선까지 뛰어넘는 그야말로 "사탄도 이건 좀" 하면서 물러갈 인물. 보면서 욕이 절로 나오는 인물.
그런데 매력적이라고 하다니 이해가 안 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막장드라마의 시어머니가 그렇듯, 인간성의 끝을 달리는 인물이 있어야 이야기가 더 자극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어떻게 저런 인간이 있나 하고 혀를 차면서도 채널은 돌리지 못하는 묵직한 MSG의 맛인 것이다. 이런 인물한테는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욕망을 향해 뒤도 보지 않고 빠르게 나아가는 능력 있는 캐릭터다.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귄력을 쥐고 흔드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인다면 너무 주관적인가? 무릇 시련이 있어야 성장이 있는 법. 최종 보스이자 인생을 뒤흔들 재앙인 그녀는 이 작품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다. 물론 가끔 보다 저절로 저혈압이 치료되긴 하지만, 너무 과몰입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나중에 내용을 더 추가할 수도 있지만, 우선 내가 꼽은 마드리드 모던걸의 특징은 이렇게 큰 틀을 이루고 있다. 막상 보고 나서는 생각보다 사랑에 좌지우지되는 스토리가 많아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사랑과 인간관계가 이 작품의 핵심 주제를 관통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선택이다. 이 작품 속 인물들 모두 로맨스 관계가 있지만 매번 선택을 한다. 그리고 그 선택이 때로는 재미있는 전개로 흘러간다. 이 작품에 애정이 가는 이유다. 훌륭한 도입부가 이목을 확 끌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그리는 서사가 재미있다. 그걸로 작품성은 충분하다. 거기다 근대적 시대 배경 때문에 독특한 디자인의 옷, 착장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 시대 영국이나 미국 배경의 작품은 쉽게 볼 수 없지만, 스페인은 보기 힘들었다. 비슷한 옷이지만 처음 보는 액세서리나, 교환원 유니폼은 확실히 눈에 띈다. 시대에 맞게 꼬여가는 스토리를 보는 맛도 있고, 이때 이런 역사적인 일이 있었구나 하고 배우는 것도 있다. 웬만큼 길이가 긴 시리즈는 오래 잡고 있기 힘든데, 덕분에 다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