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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Nov 06. 2019

7-1. 럭키 넘버 세븐

일곱 번째 데이트 - 광부씨



“혹시 알아? 이번엔 럭키 넘버 세븐이니까 잘될지? 그 사람 사진에 좋은 느낌이 있어.”


회사 동료가 신나는 목소리로 얘기한다. 나를 응원해 주려는 말이겠지만 그 말을 믿어보고 싶다.


‘럭키 넘버 세븐... 정말 그랬으면 좋겠네.’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에게 열리고, 서로에게 끌리고, 같은 것을 원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그게 나에게 가능은 한 것인지 하는 생각에 지쳐가고 있었다. 낯선 이에게 마음을 잘 열지 못하는 내가 문제인가 자책도 하고, 내 나이대에 남은 남자들 중에는 내가 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절망도 하고, 꼭 연애를 하지 않아도 난 충분히 행복하다고 자포자기도 하며 기운이 많이 빠져 있었다. 그런 나에게 포기하기 전에 딱 열 명만 채우자며, 나의 연애가 우리 공동의 사명이라도 되는 듯 꽤 진지하게 말하는 룸메이트때문에 한참을 웃었다.


‘그래, 열 명을 만나도 안되면 그땐 연애에 대한 노력과 미련을 깨끗이 터는 거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 나서, N을 만났다.


간만의 데이트라 룸메이트와 함께 신중하게 의상도 골라 놓았다. 튀지 않지만 발랄한 카키색 원피스에 태어나 처음 사본 데님 재킷과 흰색 플랫을 매치했다. 패션모델 경험이 있는 룸메이트의 선택이라 그런지 마음에 들고 믿음도 갔다. 그런데 그날따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5월이 되었는데도 이 놈의 날씨는 따뜻해질 기색이 없다. 원피스는 아무래도 추울 것 같았지만 다시 의상을 고르자니 머리가 아팠고 시간도 없었다. 우산을 챙겨 들고나가며 제발 비가 많이 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만나기로 한 맥주집이 있는 건물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건물 전면이 공사용 임시 벽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레스토랑 입구를 찾는 일이 마치 미로를 헤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는 미로를 헤매듯 어려운 일이다. 어디에서 벽이 나타나 길을 막을지,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출구는 얼마나 더 가야 나오는 지 알 수가 없다. 이 불편한 짓을 그만두기 위해서라도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그가 나타났다. 겹겹이 둘러쳐진 하얀 벽 틈으로 갑자기 등장한 그는 순간이동이라도 해서 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았다. 단정한 차림에 커다란 키, 다부진 몸매에 따뜻한 인상의 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악수는 너무 딱딱한가요?”


부드러운 저음의 남자답고 친절한 목소리에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으로 살짝 놀랐던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우리가 자리에 미처 앉기도 전에 아이가 둘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예기치 못한 그의 고백에 조금 당황했지만 안심이 되었다. 나처럼 아이가 있는 남자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은 다들 아이가 있는 나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했지만, 아이가 없는 그들이 아이가 있는 삶의 본질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나자마자 아이가 있다고 말하는 N의 심정이 헤아려졌고 반갑기도 했다. 그에게 나도 아이가 있다고 하자 그도 안심하는 눈치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족사항을 시작으로 첫 데이트를 시작했다.


그 어떤 의식적인 노력은 필요 없었다. 그와의 대화는 오랜 친구와의 대화처럼 너무 편안했고, 서로 웃음이 끊이지 않게 즐거웠다. 우리에게 공통 관심사가 있는지, 대화의 지적 수준이 비슷한지, 대화가 얼마나 매끄러운지를 따지는 것은 대화가 즐겁지 않을 때만 적용된다. 매력적이고 유쾌한 그와의 대화는 이런저런 조건을 따질 것도 없이 그냥 즐거웠다. 별것이 아닌 이야기에도 웃음이 났고, 내가 웃으면 그는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했다.


처음 만난 그와 있는 것이 오랜 친구와 있는 것처럼 편안한데, 또 동시에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를 바라보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지만,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두 볼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내 주량이 맥주 한잔에 취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그도 내가 마음에 들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눈을 바라보는 내 마음속까지 그의 환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이 바로 이것인가 보다. 그가 따뜻하고 밝고, 그리고 바른 사람이라는 느낌이 그의 모든 것에서 전해져 왔다. 그의 눈빛이, 그의 웃음이, 그의 목소리가, 그의 모든 것이 친절하고 친근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이제까지 존재조차 알 지 못했던 누군가를 만나 이렇게 확실하게 긍정적인 감정이 든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N에게 강하게 끌리고 있었다. B가 말했던 그 첫 만남의 끌림이 나에게도, 드디어 일어났다. 처음 알게 된 그 생소한 느낌에 마음이 설레었다. 그와의 두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가버렸다.


"키스, 아니면 허그?"

"......?!"


그도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알았지만 키스라니...?! 나는 갑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 버렸고, 그도 얼굴을 붉히며 당황했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는지 그가 황급하게 스스로의 질문에 답을 했다.


"이번에는 그냥 허그만 하죠."

"이번에는요."


당황해서 멋쩍게 웃는 그가 귀여웠다. 데이트 내내 나에게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했던 그에게서 기대하지 못했던 마지막 인사라 놀란 것은 사실이었지만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도발적인 질문에 그와의 키스가 어떨지 궁금해졌다.


3 Brewers Adelaide, Toronto, ON


"언니! 언니가 남자 만나고 웃으면서 들어온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집에 돌아와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인데 룸메이트가 신이 나서 말한다. 참을 수 없는 웃음 때문에 얼굴 표정이 관리되지 않아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질문을 퍼부을 기세도 없이 문자가 왔다. 가슴이 떨려서 바로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럭키 넘버 세븐이 즐거웠기를 바래요. 나는 그랬거든요. 이번 주말에 다시 데이트하고 싶은지 알려줘요.'


자기가 나의 일곱 번째라며 럭키 넘버 세븐이라고 신나 하던 그의 웃음이 떠올랐다. 이렇게 솔직하게 데이트를 다시 신청하는데 나도 솔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신 이야기에 너무 집중했는지 우산을 잊어버리고 와서 다시 레스토랑에 갔었어요. 오늘 너무 좋았어요. 즐거운 저녁 고마워요.'

'정말 즐거웠어요! 우산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게요.'


그리고 그는 끝에 우산과 키스 이모티콘을 붙였다. 밀당이고 뭐고 필요 없다. 이렇게 솔직하고 스윗한 남자가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났다 싶다.


우리는 그 이후로 매일 문자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서로 회사에서 얼마나 바빴는지부터, 우리가 디씨(DC)보다 마블(Marvel) 영화가 더 좋다는 것에 동의한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점심 미팅과 저녁에는 무엇을 먹었는지, 밤늦게 세탁기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지루한지, 나에게 안경이 얼마나 잘 어울리지는 등 아주 사소한 일상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의 첫 데이트가 얼마나 즐거웠는지,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토요일은 왜 이리 더디 오는지도 이야기했다. 서로 나누는 아침인사에 하루 종일 활기가 솟았고, 잘 자라는 인사에는 마음이 나긋나긋해졌다.




사진: 3 Brewers Adelairde,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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