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번째 데이트 - 자전거남
드디어, 여름이 왔다.
코로나가 터진 3월 이후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호텔은 아직 문을 닫은 상태이고, 배급받듯 줄을 서서 장을 보고, 뉴스는 여전히 코로나가 독차지다. 숨 막히는 락다운은 그대로지만, 수개월의 격리생활을 견뎌온 사람들에게 여름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다. 한국과 다르게 습하지 않은 이곳의 여름은 정말 좋다. 따갑지만 눅진하지 않고 산뜻하다. 두 손을 모으면 사라락 담길 것 같은 햇살이 무수히 쏟아진다. 코로나 때문에 침울했던 기분도 햇살 속에 따사롭게 파묻히는 느낌이다. 길도 나무들도 사람들도 그 햇살을 받고 다시 살아난다. 이 고마운 여름의 하루가 저녁 8시가 넘어도 지지 않는다는 건 또 얼마나 큰 덤인지.
이대로 여름이 끝나지 않는다면 코로나 시국도 견딜 수 있지 않을까. 팬데믹 선포로 호텔 문이 닫혔을 때 최소 한 달은 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넉 달이 넘어간다. 상황이 장기화된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일까. 확진자 수가 줄고 있다고 하지만, 코로나가 조만간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현실은 여전히 불안하고 마음은 복잡했지만, 그래서 나는 더 뭐라도 하기로 결심했다. 일식당에서 주문을 받고 음식을 포장해 주는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집에서 가만히 놀지 못하는 팔자인가 보다. 비록 최저시급이었지만 직원들 먹이는데 아끼시지 않는 사장님 덕에 좋아하는 초밥과 사시미를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처음 해보는 식당 일이라 서툴렀지만 재미있었다. 테트리스를 쌓듯 음식을 착착 반듯하게 포장해 손님들 손에 들려주는 느낌이 좋았고, 그들이 집에 가져가 맛있게 먹을 상상에 나름 보람도 느꼈다.
그리고, 잠수를 당하고 의기소침했던 기분을 털어내기로 했다. 어차피 겪어 보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다. 잠수도 겪어 보니 숙제 하나를 해낸 기분이랄까. 코로나를 탓하기엔 연애관계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 중이다. 코로나로 직장을 옮기지 않았더라도, M은 언젠가 그렇게 비겁하게 떠났을 것 같다. 코로나의 잘못도, 내 잘못도 아니다. 그와의 관계가 망한 것도 아니다. 끝이 없이 끝난 관계라도 그것이 나에게 남긴 의미와 추억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다. 부족한 나를 채우고자 시작했던 일이니, 그 나름대로 내게 남겨진 것을 담으면 된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만나는 자체를 꺼려했던 분위기도 여름이 되니 조금 누그러졌다. 바깥세상으로 나온 사람들은 다시금 다른 이들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다. 아직 한집 식구가 외부인을 만난다는 게 어색했지만, 늘 그래왔듯 사람들은 끊임없는 변화에 끊임없이 적응해 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코비드 일상에 잘 적응하고 계신가요?'
G의 첫인사도 그런 맥락이었다.
'뭐 그럭저럭이요. 다들 그냥 적응하는 거죠.'
다른 어떤 안부보다 코로나를 잘 버텨내고 있는지가 모든 관계의 주된 인사가 되었다.
'얘기해 보니 좋으신 분 같아요.'
'하하... 만났는데 아니면 어쩌죠?'
'직접 만나는 거 괜찮으세요?'
'네, 저는 상관없어요.'
'하긴, 서로를 알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죠.'
만남을 위해 시작한 관계에서도 만나는 게 괜찮은지 물어야 하는, 우리는 코로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얀 셔츠에 파란색 자전거를 끌고 나온 G의 첫인상을 계절로 표현하자면 딱 그해 여름이었다. 여름은 여름인데, 오랜 격리 뒤에 나온 바깥세상의 낯섦이 더해진 여름. 백인치고도 유난히 하얀 피부에 눈썹까지 금발에다 키는 또 어찌나 훌쩍 큰지. 번역된 외국소설 속 인물이 눈앞에 있는 것 같은, 묘한 이질감이랄까. 절대 나쁜 의미는 아니지만, 나를 살짝 긴장하게 하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그는 스스럼없이 유쾌했다.
"와, 사진과 똑같으시네요!"
"좋은... 뜻이죠?"
"네, 그럼요! 아주 좋은 뜻이에요."
살짝 가벼운 목소리와 하얗고 가지런한 웃음이 소설 속 캐릭터 같은 이미지에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걸었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거나 커피숍에 앉아 서로에 대해 묻는 것은 더 이상 일반적인 첫 데이트가 아니다. 날씨가 따뜻해진 이후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 걷고 또 걸었다. 걷는 것 이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우리도 걷는 것에 동의했다. 걷는 것은 최고의 운동이기도 하지만, 최고의 첫 데이트이기도 했다.
일단은, 그 심기 불편한 눈빛 교환을 마주 앉아 하지 않아도 된다.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너무 눈을 피한다는 느낌, 그 중간 어딘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부단한 노력을 했던가. 서로 같은 방향을 향해 걸으면 상대방의 눈이 아닌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화장이 망가지지 않았나 미소가 가짜스럽지 않나 하는 걱정도 훨씬 줄어든다. 게다가, 대화하기도 어색한데 그 와중에 밥을 먹어야 하는 거추장스러움을 심지어 돈을 내가며 하지 않아도 된다. 코로나는 첫 데이트의 틀을 깨고 그 고질적인 수고스러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 물론,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시적 인지 영구적 일지 모르는 변화이지만.
전형적인 소개팅용 질문을 주고받다 호수를 왼쪽으로 끼고 걸을 무렵, G가 갑자기 물었다.
"당신의 꿈은 뭐예요?"
"꿈이요?"
"네, 꿈이요."
"아, 그건..."
말문이 막혔다. 취업 면접 중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은 것처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꿈이라니. 그런 질문을 소개팅 중에 받은 건 처음이었다.
'장래희망... 을 묻는 건가?'
나는 황급히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취준생처럼 머리를 짜냈다.
'장래희망이라면 초등학교 때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자기소개하면서 발표하던 그거? 내 장래희망이 뭐였지? 선생님??'
확실히 선생님은 못 되었고, 앞으로도 될 계획은 없다. 지금의 호텔리어도 원해서 된 것이 아니라, 외국에 나와 먹고 살려다 보니 상황에 따라 운에 따라 어쩌다 되었다. 안 그래도 호텔 업계를 떠나야 하던 참에 코로나가 터져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앞으로 뭐가 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꿈이라는 단어를 하고 싶은 직업이라고 지극히 80년대 초등학생적인 해석을 하다가, 그게 꿈의 정의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뭐지?'
꿈이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 꿈에 대해 생각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한 번도 꿈에 대한 정의를 스스로 내려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릴 적 꿈이 뭐냐던 어른들은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 즉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이 무엇이냐를 물었었다. 그 어른들의 나이가 되어 보니, 희망직업이 꿈이 될 수는 있지만 모든 꿈이 희망직업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면 이제 어른이 된 나는 어떻게 꿈을 정의 내릴 것인가. 꿈이 뭐냐는 처음 만난 이 남자의 질문에 뭐라고 답해야 할 것인가. 다분히 철학적인 이런 질문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상 바로 대답하기 불가능하지 않나. 하지만 이 건 다음 주까지 잘 생각해 보고 제출하라는 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고백하기로 했다.
"솔직히 꿈에 대해 생각해 본 게 언제인지 모르겠어요. 꿈이라는 게 뭐죠?"
부끄러웠다. 소개팅 중에 면접을 당한 것 같아 억울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의미의 꿈을 물은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음... 5년 안에 이루고 싶은 일? 가장 원하는 것이요."
"내가 가장 원하는 것?"
"네. 그게 뭐든지 말예요."
역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번엔 역질문으로 대응했다.
"음... 그럼 당신의 꿈은 뭔데요?"
17년간 해온 스테레오 장비 사업을 정리 중이라는 그는 일단 쉬면서 다시 여행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코로나 덕에 여행은 이제 꿈만큼 생소해진 단어였다. 사업상 전 세계로 여행을 다니던 그에게 여행은 이젠 꿈이 되어버렸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니 꿈에 대해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라면 뭔가 의미 깊고 쉽게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지금은 코로나로 여행이 일시적으로 불가능하지만, G의 꿈이 각고의 노력 끝에야 이룰 수 있는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 나를 위한 것.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는 것. 그것이 꿈이라면 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자주 만나러 갈 수 있는 거요. 그게 내 꿈이에요."
"거 봐요! 어렵지 않죠?"
"하하, 네 그러네요."
"그럼, 그 꿈을 위해 필요한 게 뭐죠?"
"나 정말 면접 보러 온건가요? 질문들이 역시 사업가답네요."
"하하하,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요. 미안해요"
"아무래도... 경제력이죠. 한국 가는 비행기표 엄청 비싸거든요!"
G와의 만남은 그 한 번으로 끝이 났다. 꿈꾸는 연애가 각자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의 만남으로 잊고 살았던 꿈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현실의 치열함과 고단함에 치여, 소망했던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은 실망과 괴리에 묻혀, 꿈을 잊고 살았다 했다.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듬고 귀 기울이지 않았던 나 자신에 대한 무책임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나를 위해 연애를 하고자 했듯, 꿈도 나를 위한 것인데.
그러고 보니 열 명만 채우자던 예전 룸메와의 약속을 지켜냈다. 이제 소개팅이고 연애고 포기해도 된다. 열 번의 소개팅 후 내 옆에 남은 사람은 없지만, 그들과의 추억과 각각의 만남이 준 교훈(?)이 남았다. 그런데 아직 포기할 수가 없다. 내 옆에 남아줄 한 사람, 내 마음을 여름 햇살처럼 눈부시게 해 줄 그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이제 나를 위한 꿈들 중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진: Toront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