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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Apr 09. 2022

첫사랑의 라일락

번외 편



90년대 말, 주변 신도시 개발 속에 쇠락해 가는 작은 마을의 한 여자 고등학교. 그곳에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장소는 운동장 스탠드였다. 시멘트로 지어진 계단식 스탠드는 오래 앉아 수다를 떨어도 허리나 다리가 아프지 않고 딱 적당한 높이였다. 언덕 위에 학교가 있어서 스탠드에 앉으면 널찍한 운동장 밖으로 마을과 그를 둘러싼 산봉우리들까지 한눈에 보이는 것도 그곳의 매력이었다. 전교생을 다 수용하도록 커다란 스탠드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자리는 바로 라일락 나무 아래였다. 봄이 그윽해지고 휑한 운동장을 쓸고 다니던 바람마저 부드러워지면 새하얀 라일락 꽃이 만개했다. 여고생들은 그 라일락 향기를 사랑했다.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잎이 다섯 개인 행운의 라일락을 찾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J는 밤의 라일락을 특히 사랑했다. 늦은 시간까지 고된 공부를 잠시 쉬며 찾는 곳이 3학년 8반 그녀의 교실 밖 라일락 나무였다. 이상하게도 밤이면 라일락 향기가 더 짙어지는 것 같았다. 향기도 향기지만, 무리지은 하얀 꽃들은 밤이면 영롱한 빛을 발산했다. 작은 꽃잎들이 모여 뿜어내는 빛이 나무 주의를 둘러싸서 신비한 기운마저 돌았는데, 그녀는 부처에게 비친다는 후광이 그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무 아래에 앉으면 라일락 향기와 함께 그 빛도 그녀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열아홉 살의 J와 서른한 살의 B가 만난 건 그 하얀 라일락 향기가 밤하늘에 깃들던 오래된 봄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열아홉 살이 가지는 가장 큰 의미는 고3이다. J도 여느 대한민국 고등학생과 마찬가지로 대학이라는 목표 하나를 위해 살아왔다. 새벽 5시에 기상해서 새벽 1시까지 공부하는 생활이 죽도록 힘든 건 아니었다. 입시 준비에도 친구들과 나누는 감성은 풍부했고, 여고 나름의 낭만도 있었다. 혹시라도 친구들 사이에 기가 죽을까 아빠랑 동생 몰래 더 주시는 엄마의 비밀 용돈도 좋았다.


하지만 곧 치러질 수능, 그 한방에 인생이 결정될 것을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했다. 가고 싶은 학교, 하고 싶은 공부, 살고 싶은 미래는 그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었다. 세 자리 수능점수가 결정해 줄 것이다. 돌아가는 길은 없었다. 삐끗하면 떨어져 버릴 벼랑 아래가 너무 공포스러워 숨이 막혔다. 유일한 위로는 그녀가 혼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88만 5천 명의 다른 수험생들이 같은 벼랑 끝에 서 있었다.


90년대 대한민국에서 결혼 안 한 서른한 살이란 노총각, 노처녀를 뜻했다. 누나가 둘, 여동생이 하나인 집안의 외아들에게 그보다 더 참담한 죄목은 없었다. B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가 길에서 만난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그를 버리기 전까지는.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는 그녀를 기다렸지만, 새로 만난 남자와 오래가지 못한 그녀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아직 사랑을 믿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 결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른 노총각 동료들이 소개팅이란 발랄한 타이틀로 포장된 맞선을 나갈 때도, 그는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결혼하려고 했던 건 그녀를 사랑해서였는데, 아직도 그녀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는데, 아직 다시 사랑할 준비가 안됐는데. 하지만 결혼에 대한 압박은 하루하루 더 무겁게 그를 짓눌러왔다.


그런 열아홉 살의 그녀와 서른한 살의 그는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 주기로 했다. 학생과 교사라는 신분에도 둘은 서로에게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게 좋았다. 그들의 번뇌는 당연히 다른 종류였지만, 그 어쩌지 못하는 번뇌로 가슴이 묵직하게 짓눌려 있는 그들은 동지였다. 다른 나이에 다른 신분인 두 사람이어서, 어쩌면 서로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순수하게 들어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실 J는 의도적으로 B에게 접근했었다. 그녀가 짝사랑하는 수학선생님과 B가 친구였기 때문이다. 수학선생님에 대한 정보를 캐낼 목적으로 B가 담임을 맡고 있는 반 반장인 그녀의 절친을 핑계 삼아 그에게 따로 만나자고 했다. 물론 그 일의 배후에는 절친도 있었다. 그녀와 절친은 수학선생님을 같이 짝사랑했기 때문이다. 반장으로서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선생님과 독대를 신청한 의리녀로 가장했다. 그는 처음부터 그녀의 의도를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서 반장의 고민을 심각하게 전달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더 문제가 있으면 전화드려도 되나요?"


수학선생님에 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기 위해 측근의 전화번호를 따는 게 그 미션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그는 흔쾌히 삐삐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녀의 스파이가 되어 주기로 했다.


"수학선생님 지금 체육관에서 배드민턴 치신다!"

"수학선생님 오늘 숙직하신다. 커피 사다 드려!"

"수학선생님 이번 주말에 소개팅하신대. 분명 또 퇴짜 맞겠지, 걱정하지 마!"


수학선생님에 대한 그의 정보통은 하루 종일 공부에 지쳐있던 그녀를 한껏 신나게 해 줬다. 그는 확실히 다른 선생님들이나 어른들과는 달랐다. 그는 (선생님 짝사랑 같은) 쓸데없는데 신경 쓰지 말고 공부나 하라던지, 너만 고3 아니고 힘든 거 아니라던지, 하고 싶은 건 일단 대학 가서 생각하라던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따뜻하고 다정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그 누구보다 편하고 친근했다.


"선생님, 공부가 안되는데 지금 전화해도 되나요?"

"선생님, 주말에 칼국수 사 주시면 안 되나요?"

"선생님, 야자 하기 싫은데 약수터 가요!"


교무실 생수가 떨어지면 근처 약수터에서 물을 떠 왔는데 그때가 탈출의 기회였다. 약수 떠오기 임무를 맡은 그와 야간 자율학습을 땡땡이친 그녀는 신이 나서 학교를 나갔다. 약수를 떠 오다가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르는 것은 둘이 가장 좋아했던 액티비티였다. 고작 남들 몰래 아이스크림 사 먹는 일이지만 그녀는 자유를 느꼈고, 그는 동심으로 돌아갔다.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본 수업 이후 보충수업, 그 후 자율학습. 학생도 교사도 대학입시라는 죄목으로 하루 종일 갇혀 지내는 학교라는 감옥에서 그 둘은 그렇게 서로 친구가 되어주었다.


빛나던 라일락꽃이 지고 이름만 방학인 여름방학도 지나는 동안, 둘은 각자에게 가장 치열했을 그 해를 살아내고 있었다. J는 여전히 수학선생님은 짝사랑했고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한 덕에 모의고사 성적이 많이 올랐다. 여자 친구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한 B는 소개팅을 하기도 했다. 물론 잘되진 않았지만 괜찮았다. B는 집안에 성의만 보이면 되었고, J는 그가 여전히 친구로 있어주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가 결혼을 하면 지금처럼 친하게 지내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주중엔 고3 학생과 담임으로 쉴 틈 없는 학교 스케줄을 견뎌내고, 주말엔 서울 K문고에서 만나 수험서와 가요 씨디를 함께 골랐다. B는 수능 100일 기념으로 약속했던 드라이브를 가주었고, J는 당시 가장 핫하던 세일러문 주제가를 그의 삐삐 멘트로 바꿔 주었다. 함께 나누는 사소한 것들이 삭막하고 고된 매일을 사는 그들에게 쉼터가 되어주고 웃음이 되어주었다. 


다시 찾아온 가을이 깊어 가고 수능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어느 날, B는 J에게 학교를 탈출하자고 했다. 늘 그렇듯 그들의 탈출은 충동적이었다. 얌전하고 소심하고 간이 작은 그들에게 계획적인 탈출은 실행 가능성이 적었다. 매일 해가 조금씩 짧아지더니 어느새 밤이 내려앉고 있던 운동장에 모래 먼지가 일었다. 아무도 그 둘이 탈출한 것을 알지 못했다. B는 북쪽으로 차를 몰아 통일로로 진입했다.


"우리 월북할까?"

"네? 월북이요?!"

"응! 이 길로 계속 가면 돼."

"진심이세요?!"


그는 정말 끝까지 달리려는 것 같았다. 그들이 탄 차는 헤드라이트 끝 새까만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 속 타임머신 같은 기묘한 분위기는 시공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듯 느껴졌다. 그대로 달리면 북한이 아니라 블랙홀 넘어 다른 세계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북한이든 다른 은하계든 상관없었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중요한 것은 어디냐가 아니었다. 그저 여기가 아니면 되었다.


결국 차는 아무도 없는 깜깜한 통일로 가장자리에 세워졌다. 호기 가득한 그들의 월북 기도는 불과 이십여 분 만에 끝이 났다. 하지만 마음은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던 듯 둘은 꽤나 흥분돼 있었다. 가을밤 공기는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에 딱 적당히 서늘했다. 북쪽으로 한참을 달린 덕에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그렇게 많은 별은 그녀에겐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별이 쏟아질 것 같다는 그 식상한 표현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날 밤 그 표현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말로만 듣던 은하수를 실제로 본 것도 처음이었다.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사진 속 은하수를 직접 보려면 티베트 고원 정도는 가야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은하수는 현실에서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상상만 하던 비현실이 현실이 되어 그녀의 눈앞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 그녀의 별도 있었다.


"저기 땅에서 가장 가까운 작은 별이 네 별이야. 혼자 떨어져서 훌쩍이는 별."


그의 손끝을 따라간 낮은 산등성이 위로 별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혼자 떨어져 훌쩍인다는 표현이 야속하리만치 적절했다.


"제가 언제요?!"

"딱 너 맞는데 뭐."


은하수 - https://www.huffingtonpost.kr/wootae-kwon/story_b_7305858.html


그녀는 뾰로통하게 반박했지만, 실은 그의 말이 좋았다. 김춘수의 시에서 이름을 불러 주면 꽃이 되는 것처럼, 그가 알아봐 주어 저 작은 별이 그녀의 별이 되었니까. 그녀도 그랬다. 눈에 띌 것 하나 없는 지나치게 평범한 여고생인 J. 하지만 그는 그녀가 특별하다고 얘기해줬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이 그에게는 큰 복이었다고, 친구가 되어 주어 고맙다고 했다. 그와 친구가 된다는 건, 그녀의 19년 인생 중 가장 특별한 일이었다. 선생님이고 어른인 그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으면 위로가 되고 기운이 났다. 잘하고 있다고, 잘 해낼 거라고 믿어주는 어른 친구가 있다는 건 일반 고3들에겐 일어나지 않는 특별한 일이 확실했다. 그가 그녀를 알아봐 주고 친구라고 불러 주어서, 처음으로 그녀는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B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를 어른답지 못하다고 했다. 정확히는 그의 감성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나이면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고 미래를 준비해야지, 새봄의 꽃향기라던가 제자들이 수줍게 건네준 쪽지 따위에 마음을 쓰는 건 어른답지도 선생답지도 못했다. 서른의 나이에 보내는 그의 행동과 마음은 다른 사람의 눈 속에 들어가면 철부지적 진실로 무참히 살해되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그녀와 있으면 그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그보다 한참이나 어린 학생이었지만 그녀 앞에서는 속마음을 열어 보일 수가 있었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는 서러운 서른의 그를 격려해주고 보듬어줬다. 그녀의 앞에선 온전한 그 자신이 될 수 있었다.


혼자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거나 두려워지면 둘은 서로를 찾았다. 서른하나는 열아홉을, 열아홉은 서른하나를 위로하기 위해 시를 써 주고 노래를 불러 주고, 약속을 하기도 했다. 내년 석가탄신일에 만나 서로의 마음속 부처를 만나게 해 주자고, J가 역사학과에 가게 되면 같이 보물을 발굴하러 가자고, 10년 뒤에도 둘 다 미혼이라면 서로 결혼해 주자고.


그때는 몰랐다. 그것이 J에게 첫사랑이었다는 것을.




안 그래도 겨울이 춥고 긴 이곳에 일 년이 넘도록 끝날 기미가 없는 팬데믹이 겹친 지난겨울은 그 어느 해 보다 지겹고 고되었다. 그나마 기온이 올라 드디어 회사 밖으로 산책을 나갈 수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겨우내 머물렀던 눈구름이 떠나 파랗게 제 모습을 찾은 하늘은 눈부셨고, 머리 위로 느껴지는 따뜻한 햇살은 그동안 잘 지냈냐고 안부를 묻는 듯했다. 가을이면 토론토 국제영화제가 열리던 큰길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불현듯 떠난 지 이십 년도 더 된 고등학교 운동장이 생각났다. 그리고 미소가 한없이 따뜻했던 안경 쓴 그 얼굴도 떠올랐다. 


'별일이네 갑자기...'


실없는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는데, 오래되었지만 분명히 기억하는 어떤 향기에 고개가 돌려졌다. 모퉁이에 놓인 벤치 위로 뻗은 나뭇가지에 라일락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앙상하기만 해서 라일락 인지도 몰랐던 나무에는 어느새 자잘한 꽃들이 하얗게 피어올라 특유의 향기를 거리에 한가득 뿜어내고 있었다. 부드러운 듯 강렬하고, 청순한 듯 화려하고, 달콤한 듯 쌉싸름한 향기는 언제라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그곳으로 매번 나를 데려가는 그 향기를. 


감각은 인간의 몸에 내재된 타임머신이다. 과거에 느꼈던 어떤 맛, 냄새, 소리, 감촉, 형태는 몸에 새겨진 코드와 같다. 그리고 그 코드가 다시 가동되면 우리는 그 감각이 발생했던 과거로 순간 이동하게 된다. 특히 후각은 뇌에서 기억과 감정이 저장되는 부분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후각을 통한 기억은 더 오래 기억되고, 추억이 주는 감정적 느낌을 다른 감각에 비해 훨씬 더 잘 전달한다고 한다. 라일락이 내겐 그런 향기다. 고등학교 운동장 스탠드와 그곳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이 늘 라일락 향기 속에 되살아 난다.  


'선생님은 행복하실까?'


내가 대학을 간 그 해에 선생님은 소개팅으로 만난 분과 결혼을 하셨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락을 끊었다. 누가 안된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은 결혼을 하시고 집을 사시고 아이들을 낳으시고 그렇게 어른의 삶을 살아가셨다. 나는 대학에 가서 억눌렸던 시절에 대한 보상을 마음껏 누렸다. 원했던 역사학과에 가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전국 유적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같이 보물을 발굴하러 다니자던 선생님은 안 계셨지만, 나는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았다. 삶은 하루하루 같은 것 같지만 분명 조금씩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가고,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삶에서 멀어져 갔다. 


사람이 향기로 기억되는 건 
그리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 기억의 향기 -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만나 먼 타국에서도 라일락 향기에 선생님을 기억하는 것이 나의 뇌구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은 분명하다. 소년 같던 그 맑은 미소를 떠올렸을 때 아직 마음이 아린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랑을 믿었던 선생님은 행복하실까. 나는 그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있을까. 사랑을 알기엔 너무 어렸던 열아홉의 첫사랑은 이렇게 오래 남아 봄마다 나를 찾아온다. 




겉표면의 인조 가죽이 가루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한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써 놓은 알 수 없는 암호들과 스티커로 가득한 그 시절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맨 뒷장에는 열아홉의 그녀가 서른하나의 그를 위해 써 준 시가 적혀 있었다.  



         별, 노래, 시.



그에게

노래를 들려주려고

거리를 헤매었습니다.


하얀 라일락 밤새 빛나던 향기 같은

맑게 숨었던 파란 하늘 반달 같은


그렇게 가슴에 고이 새겨 줄

노래를 찾아

온 거리를 헤매었습니다.


헤매다 헤매다

어느 슬픈 계절의 모퉁이에서

지친 눈빛에 돌아설 때에


반짝,

떨어지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작게 소곤대며 눈물 나던 별들 같은

끝내 진실한 하늘 가득히

노래가 쏟아졌습니다.


별이 흐르던 그날 밤

그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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