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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Jan 15. 2022

9-5.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아홉 번째 데이트 - Mr. L



내 생일을 위해 만난 이후 그는 많이 바빠졌다. 정박해 있는 마리나와의 계약이 끝나 가 배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모든 레저 항해를 금지시켰고, 옮겨 가는 곳의 마리나는 언제 정박할 수 있는지 확답을 주지 않았다. 모든 게 코로나 때문이었다. M은 계속 수소문을 하는 와중에 휴면기간을 끝낸 요트의 첫 항해를 위한 정비를 해야 했고, 동시에 그의 회사는 코로나로 급변하는 상황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일했다.


그렇게 며칠을 고생하여 드디어 마리나를 옮긴 날 밤, 토론토에 큰 폭풍이 불었다. 그가 새로 정박한 토론토 아일랜드는 거센 비바람으로 나무들이 쓰러져 섬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그의 요트는 물과 난방도 끊어지고, 냉장고는 더 이상 그의 식량을 보관할 능력을 잃었다. 결국 그는 급하게 다른 도시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대피해야 했다. 그렇게 2주간 그를 만날 수 없었다.


Toronto Islands seen from HTO Park, Toronto, ON


그래도 오후 늦게까지 문자 한 통 없던 그날은 이상했다. 나야 정신없을 그를 생각해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까지 연락이 안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 잊어버렸어?'


저녁시간이 되도록 답이 없었다.


'괜찮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혹시 이번엔 말도 없이 잠적을 한 걸까.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한 시간이 더 지나서야 드디어 문자 알람이 울렸다.


'오늘 너무 힘든 날이었어.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내일 얘기하자.'

'아, 그냥 괜찮은 건가 해서. 미안... 불평하려는 게 아니라 그냥 보고 싶어서. 내일 꼭 전화해.'


무슨 일일까.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는데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괜찮다고 말해줘.'

'난 괜찮아.'


그리고 이틀 동안 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걱정과 원망에 하루 종일 속이 타 들어갔다. 보내는 문자마다 답이 없었다. 기다려 달라는 한 마디만 해줘도 될 텐데, 그 한 마디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대체 무엇일까. 수많은 시나리오들이 얼키설키 뒤엉켜 내 머릿속 구석구석 잔가지를 뻗어 나갔다. 지칠 대로 지쳐 잠이 들기 전, 그에게 마지막으로 문자를 보냈다.


'M, 제발 대답해줘. 내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라도 있다면.'


내일 아침에도 답이 없다면 나는 어떡해야 할까. 절망적인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앞뒤를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쫓기는 꿈을 꾸다 새벽에 잠이 깼다. 깨자마자 습관처럼 들여다본 전화기 화면에 그의 문자가 와 있었다.

 

'그동안 네게 거리를 둔 거 정말 미안해. 지금 내 삶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어. 처음엔 회사에서 해고를 당했다가 다시 다른 직책으로 갈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는데, 해외 발령이야. 지금 상황에서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걸 받아들여야 할 것 같아. 너무 예상치 못한 일이라, 지금 가족들 도움으로 정신없이 이 상황을 정리하고 있어. 연락할 수 있을 때 꼭 다시 연락할게. 너에게 이런 소식을 전해서 정말 미안해. 이게 내겐 유일한 방법이야.'  


드디어 연락이 왔다는 안도감과 예상 못한 소식에 혼란이 부딪히며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기이한 감정이 나를 덮쳐 왔다. 갑작스러운 이 상황의 의미를 파악해 보려 했지만, 도저히 정신이 들지 않았다. 새벽이라는 시간도 상관없이 무작정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울리다 말고 음성메시지로 넘어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


'전화기가 꺼져있나? 그래 새벽이니 그럴 수도 있지. 아침에 다시 해보자.'


아침까지 선잠에 뒤척이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역시 벨소리가 반쯤 울리다 말고 음성메시지로 넘어갔다. 이미 일어났을 시간인데..., 설마 하는 마음에 인터넷 검색을 했다. 벨소리 없이 바로 메시지로 넘어가면 전화기가 꺼져 있는 것이고, 벨소리가 울리다 말고 메시지로 넘어가면 차단당한 것이라고 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도대체 왜......?'


문자를 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문자가 보내지지 않으면 차단당한 것이 확실해진다. 전화를 걸고 또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그를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삼일 전까지 그는 어머니 집에 있었다. 전기가 복구되었으니 요트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요트로 가기 위해서는 집에 주차를 해놓고 섬까지 들어가는 배를 타야 한다고 했다. 잘하면 집에 들른 그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크게 한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운전을 하려면 마음을 가라 앉혀야 했다.


그의 집 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집 앞에 주차되어 있는 그의 차를 확인하고도 초인종을 누를 용기나 나지 않았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1층 창문 뒤로 어렴풋이 움직이는 그림자가 느껴진 순간, 결심이 섰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심장이 귓속까지 울리게 뛰었다. 내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겨우 끌어다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안 열릴지도 모른다. 나인 걸 아는 순간 그는 그림자 너머로 숨어버릴지도 모른다.


"찰칵"


잠겨 있던 문이 열리고 손잡이가 돌아갔다. 우리는 오늘 어떻게 될까. 모든 게 끝날지도 모르지만 괜찮았다. 그렇더라도 그를 만나야 했다.


"누구......?"


머뭇거리며 열린 문으로 나온 것은 M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당황한 것은 그녀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 M 여기 있나요?"

"아니요, 지금 집에 없는데요."

"혹시... 당신이 G인가요?"


그 와중에도 그녀의 이름이 또렷이 기억났다. M이 두어 번 이름을 언급했던 그의 친구이자 하우스 메이트였다. 그녀가 이사 온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를 만나겠다고 달려온 이곳에서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내 소개를 하자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고 했다. M이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가 연락이 안 돼서... 너무 걱정이 돼서......"


울음이 터져서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몰랐던 내가 갑자기 나타나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에 그녀는 많이 당황했다.  


"M은 지금 배로 갔어요. 저런... 어떡하지. 아까 집에 왔다 갔는데. 내가 연락해볼까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쌓여 온 감정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그녀 앞에서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아... 이걸 어째...... 괜찮아요? 이런... 안아 주기라도 해야 하는데, 내가 간호사라서 지금 그럴 수가 없어요."


우는 나를 안아 주고 싶지만 코로나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다. 진정을 하고 그녀에게 설명을 해야 했다. 그녀도 M이 갑자기 외국으로 떠나게 됐다는 말을 들었지만, 어디로 가는지 언제 가는지는 모른다고 했다. 워낙 자기 얘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친구들도 그의 사생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연락이 되지 않는 사정이 있을 거라며, 그와 연락이 닿으면 내가 찾아왔었다고 꼭 연락하라고 전해주겠다고 했다.


"운전하고 왔어요? 그럼 바로 집에 가지 말고 진정이 될 때까지 차에 앉아 있다 가요."


나는 그녀의 말대로 차 안에서 한참을 더 울었다. 아무리 그의 입장에서 생각하려 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떤 상황이어야 나를 차단하고 어떤 말도 질문도 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나를 마주할 여유조차 없는 걸까, 떠나는 상황이 내게 미안해서 일까, 가지 말라고 내가 붙잡을까 봐? 나는 끊임없이 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나도 G처럼 어떤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 이유를 들으면 원망도 미련도 없이 그를 떠나보낼 텐데, 그러지 못하고 그가 떠나 버리면 영영 그 이유의 굴레에 갇혀 버릴 것 같았다.


'M,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 나를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최소한 그렇게 해줘. 보낼 수 있게 도와줘, 제발.'


구차한 애원의 메시지를 G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주가 더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또 다른 달이 지나도록. 우리가 그렇게 고대하던 여름이 왔다 다 가도록.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희미해질 때까지 기다렸다.


Darlington Provincial Park, Bowmanville, ON


이별을 한다고 해서 관계가 바로 끝나는 건 아니다. 그가 일방적으로 사라졌다고 해서 내 마음이 바로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가진 관성에 예상치 못한 정지가 가해졌을 때의 충격을 나는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그렇게 그가 이별한 방식 때문에 나는 더 많이 아파야 했다. 그 아픔을 멈추기 위해, 관계를 온전히 끝내기 위해 나는 그의 이유를 포기하지 못하고 기다렸나 보다.


사실 우리가 다시 만났다 해도 그는 내게 답을 못해 줬을지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저 나를 마주한다는 게 그가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선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그를 알지 못했던 나는 그가 나를 일방적으로 떠났다는 충격, 그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관계를 온전히 정리하기 위한 끝맺음을 갖지 못한 좌절을 다 견뎌낸 후에야 비로소 그 이유를 찾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더 이상 그를 원망하는 것도, 답을 기다리는 것도 끝낼 수 있었다.


우리는 늘 수많은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는 항상 결과가 따른다. 그도 많은 경우를 생각했을 테고, 결국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 선택이 그와 나, 각자의 삶에 어떤 결과로 남을지 당장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서로에게 최선이기를 믿는 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위로다.


나는 아직도 그의 외로움이 가엽다. 그가 어디에 있든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Sheppard East Park, North York,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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