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데이트 - Mr. L
혼란스러웠던 3월이 지나 4월이 되고, 겨울도 조금씩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있으면, 세상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는 듯 느껴졌다. 매일 하루는 어김없이 시작되고, 해는 조금씩 더 길어지고, 겨우내 야박하던 햇살도 한층 너그러워졌다.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은 여전히 서툴렀지만, 또 그럭저럭 잘 적응하며 살아내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한 상황이 언제 나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하기 어려웠지만, 그래도 여름쯤이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낙관이 사람들을 버티게 했다. 원래도 짧은 여름을 기다리며 반년의 겨울을 버티는 게 일상인 이곳이다.
락다운(Lockdown, 봉쇄령)이 내려진 토론토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M의 집에서 같이 요리하고 와인을 마시고 소파에 누워 티브이를 보며, 우리가 락다운 이전에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하는 것이 전부였다. 우리가 가장 즐거워했던 일은 함께 보낼 여름에 대한 상상이었던 것 같다. 요트를 타고 온타리오 호수를 가로질러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러 가고, 프린스 에드워드 카운티에 내려 와인을 시음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이면 아무도 없는 호수 가운데 배를 띄워놓고 단 둘이 있을 상상을 했다. 여름이 오면 호수에 던져진 햇빛과 바람이 만들어낸 반짝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바이러스 따위는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허락된 집 데이트마저 할 수 없게 된 것 역시 코로나 때문이었다. 곧 하우스 메이트로 들어오게 된 M의 친구는 수술실 간호사였는데 코로나로 인해 수술들이 연기되자 응급실로 옮겨가게 되었다.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가장 최전선인 응급실 간호사들은 심지어 가족들과도 격리할 것을 권유받는 상황이었다. 호흡기가 약한 M은 친구가 이사 오기 전에 요트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 원래도 여름은 요트에서 지내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은 추운 계절이었고 집에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지내야 하는 게 안쓰럽기만 했다.
다 큰 어른인 그가 임시적으로 집에 갈 수 없다 것만이 안쓰러웠던 이유는 아니었다. 핏기 없는 하얀 얼굴에 가끔 드리우던 어두운 표정과 더 가끔씩은 혼자만의 동굴로 들어가야 했던 그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에 대해, 그는 나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지난 40년간 내가 겪은 만큼, 내가 말하지 않는 만큼 그에게도 사연이 많을 테니까. 지나가듯 그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가 마음이 다부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자세히 물어보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아닌, 나 자신만이 들여다볼 수 있는 가슴속 그 상자가 내게도 있기에, 그의 것을 내게 열어 보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상자가 스스로를 가둘 만큼 클 수 있음을 나는 가늠치 못했다.
코로나로 인한 어려운 상황들은 그런 그의 마음을 더 자주 힘들게 하는 것 같았다. 나나 그의 동료들이 코로나로 해고를 당할 때마다 자기는 아직 직업을 가진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며 힘들어했다. 내 위로에 고맙다고는 했지만, 내가 그 마음을 별로 밝게 해 주지 못한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힘들 때면 하루 정도 세상과 단절한 채 홀로 지냈다. 늘 미리 양해를 구하고 약속했던 시간 안에 다시 연락했던 그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그가 혼자 요트에서 생활한다는 건 불안하기만 했다.
요트로 옮긴 다음 날 그를 만나러 갔다. 생각보다 생활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배를 손보느라 분주한 그를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무슨 이유인지 잘 가동되지 않는 수도 시설에 몰두하고 있는 그에게 이 배가 좋은 동반자가 되어 줄 것 같았다. 그를 도와 짐을 정리해 주고 준비해 간 김밥을 함께 먹으며 요트에서 보낸 한나절만큼은 불안한 바깥세상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둘의 체온을 나누며, 각자의 불안한 마음에 위로가 되어 주면서 하루하루 보내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작은 희망을 비웃 듯, 며칠 뒤 요트가 정박되어 있는 마리나는 배에서 생활하는 거주인을 제외한 모든 외부인과 방문자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더 이상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다음은 무엇일까. 모든 것들이 어제와 오늘이 달랐고 내일은 또 달라질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불안이 매섭게 몰아쳤다. 이른 봄의 새순 같은 우리 관계가 그 속에서 어떻게 버텨낼 수 있을까. 함께 거닐었던 강가에서 눈물 나도록 시렸던 바람을 버티었듯, 꼭 잡은 두 손의 온기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 그뿐이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겨울도 5월이 되면 드디어 마지막 꺼풀을 벗어낸다. 어제와 다름없이 나선 아침 길이 미묘하게 생기가 돈다면, 그건 싸늘했던 나뭇가지에 손톱만 하게 돋아난 5월의 새싹들 때문이다. 무채색 풍경에 익숙했던 눈이 부시게 채도가 선명한 꽃망울을 처음 만나는 것도 늘 5월이다. 눈썹에 내려앉는 햇살이 따스해지고, 쌀쌀맞기만 했던 바람이 나긋해져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면 분명 5월이 온 것이다. 그 5월만큼이나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연분홍 장미 다발이 내게 건네진 것도 5월이었다. 그는 닫힌 꽃가게 문을 두드려 사정해서 구했다며 특유의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가볍게 키스해 주는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 생기 있어 보였다.
"빨간 장미가 로맨틱하다지만 난 분홍색 장미가 예쁘더라."
조용하고 내향적인 그의 성격에 딱 어울리는 취향이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우리였지만, 이런 시기에 차가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토론토 동쪽 끝 오래된 동네로 나를 데려갔다. 네 개의 모래사장이 있어서 The Beaches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은 작은 상점과 카페들이 점점이 줄지어 있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집들이 언덕을 따라 오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예쁜 동네다. 그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어릴 적 친구들과 놀던 공원과 함께 걷던 등굣길을 따라 천천히 차를 몰던 그는 세 갈래 길이 만나는 모퉁이 건너편에 멈춰 섰다.
"저 집 이층에 창문 보이지? 저기가 내 방이었어."
그는 모퉁이에 자리한 꽤나 큰 오래된 집을 가리키며 말했다. M은 동요 없는 표정으로 조용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엄마는 승무원, 아빠는 투자전문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부터 요트를 탔다는 그의 어린 시절은 전형적인 유복한 가정의 모습이었다. 언제부터 그의 부모님이 서로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는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아마도 친정과 가까이 살고 싶어 한 엄마의 바람대로 그 집을 떠나 다른 도시로 이사 간 이후부터였을 거라는 추측은 그때부터 그 스스로가 외로워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외로움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나는 외로웠다고 말하는 그가 가여웠다. 그래서 그가 더 이상 외롭지 않게 해주고 싶다는, 참 주제넘은 생각을 했다.
외로움을 대하는 그와 나의 방식은 확실히 달랐다. 나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떨쳐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고립은 그 무엇보다 두려운 상황이다. 고립되지 않기 위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나고 그들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인다. 마음을 열었다가 상처를 받더라도 그게 내가 외로움과 싸우는 방식이다. 그렇다. 나는 외로움과 싸운다. 그리고 그의 외로움도 같이 싸워주고 싶었다.
M은 그 무엇과도 싸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몇 년이 지나도록 그에게 못되게 구는 계모에게도 그랬고, 5년간 사귄 전 여자 친구와도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코로나의 상황이 그를 힘들게 했지만 화를 내는 법은 없었다. 부모님이 그를 외롭게 했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외로움과 싸우기보단 뭐랄까,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에게 스며들어 있는 그 무언가가 배어 나올 때가 있었는데, 그건 분명 외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는 외로울 때면 오히려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외로움의 바다에 스스로를 잠기게 하는 것이 그가 외로움을 대하는 방식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감히 상상도 못 하는 내가, 그의 외로움의 메커니즘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내가 어떻게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의 이별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사진: Toronto, Ontario,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