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思적인후기]28/정유정

정유적 작가도 이제는 보지 않았을까. 인간에 대한 희망

by 거창하지않은

정유정 작가도 이제는 보지 않았을까. 인간에 대한 희망


인간이 손쓸 수 없는 불가항력 상황에 놓이게 되면 인간의 살고자 하는 본성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였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고 통제가 불가능해지고, 자연스럽게 무력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 ’너 나 우리‘ 에서 ‘우리’는 사라지고 대척점에서의 ‘너’와 ’나’만 남게 되는 것. 그게 바로 우리 모두가 만에 하나 있을 재난상황을 우려하고 염려하던 까닭 아니었을까. 눈먼 자들의 도시도 그랬고, 이 책 ’ 화양‘도 그랬고, ‘화양’이라는 도시를 창조해 낸 정유정 작가님도 그랬다.


인간은 반려동물에게도 가축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할까. 내 대답은 ‘그렇다‘였다. 생태계 최고 포식자로서, 저들의 삶을 지배하고 운명을 결정하는 변덕쟁이 폭군으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어떻든지 인간이 먼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저 반대편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인간을 넘어 ’생명‘을 지키고자 헌신하는 이들이 있으리라는, 그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희망을 놓지 못했다. 이야기는 거기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희망‘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나 역시도 그랬다. 누가 저 말에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2019년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나는 이 책에게 ’재난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 심리 분석서‘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을 것이다. 재난 앞에서 우리의 행동은 너무나도 빤히 예상되었다.


그렇지만 2019년. 나는 그래도 우리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우리 스스로 증명해 냈다고 생각한다. 2019년 대구. 책 속의 이야기가 그 시간 그곳에서 그대로 펼쳐졌지만 사람들은 책과의 반대의 노선을 택했다. 물리적 통제도 없었으며, 잔혹한 탄압과 배척도 없었으며 누군가를 버리는 일도 없었다. 물건을 사재는 등 폭동도 없었고, 줄을 서서 순서 있게 마스크를 샀고, 전국 각지에 있는 의료진들이 실사판 화양으로 뛰어들었다.


모두가 걱정하는 그런 일들, 당연하게 펼쳐질 것 같은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하나의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가 아닌, 구제역으로 살처분당하는 돼지를 보고 글을 썼다는 작가님


발행 연도를 다시 찾아본다. 2013년. 코로나19의 시대상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많아 코로나 19를 소재로 글을 쓴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작가님은 구제역 파동이 올 때마다 생매장당하는 소와 돼지들을 바라보는 인간의 잔인한 합리성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했다.


서재형은 동물을 ‘그것’이 아니라 ‘그대’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동물들이 고통받는 세상에서는 인간들도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경계지대에 동물의 흐느낌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대들의 운명과 우리들의 운명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공감의 네트워크. 그것만이 이 무간지옥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열쇠가 아닐까. 그것이 아니면 어떤 대단한 과학도 어떤 화려한 정치도 이 재앙의 도시 화양을 구할 수 없었다.
- 작품해설 중 -


우리가 사회적 약자를 쉽게 끊어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누구나 너무나도 쉽게 다양한 방식으로 의도하지 않은 어느 순간에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놓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같았던 동물들을 그야말로 쉽사리 ’손절‘해버린 화양시 사람들은 똑같이 화양시 밖에 있는 인간들에게 단칼에 ’손절‘당해버린다. 악순환은 악순환을 낳는다.


그렇다고 그럼 구제역에 걸린 소와 돼지들을 그대로 길러? 광견병에 걸린 강아지도 죽이지 마? 사람을 물어뜯은 ‘도사견’ 수준의 강아지를 그냥 둬?라는 물음 들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릴 순 없다. 나도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 대해서 ‘어디까지’ 그대로 봐야 하는지 그 적정선에 대해서는 고민이 선다. 그렇지만 한쪽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강아지들이 무한정 태어나 애견샵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어느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곧 생을 마감할 유기견의 명단이 매일매일 몇 십 페이지씩 업데이트되는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우리 인간의 행동들에 대해서는 점검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보다 더욱 끔찍한 인간들 스스로의 폭력과 증오로 인한 죽음 따위에 굴복하지 않았고, 언제 벗을지 모르지는 마스크 쓰기와 거리두기 등을 서로를 위해 끝까지 참고 지켜가며 결국 이겨냈다.


아름답고 화려한 시절에 선행을 베풀기는 쉽다.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정말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증명하는 것은, 참혹하고 비통한 시절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숨 쉬는 인간성‘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작품 해설 중-




구제역 돼지 영상 하나를 보고, 화양시라는 하나의 완벽한 도시를 만들어 낸 정유정 당신은 도대체


이처럼 생생한 소설은 실로 오랜만이다. 내가 밀착 르포 영상을 본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 정도로 이미 내 머릿속에서는 글이 아닌 [28]을 제목으로 한 영상 한 편이 저장되었다. ‘허구의 세계라 할지라도 허투루 보이지 않겠다.‘는, ’독자를 내가 만든 세계에 데려다 놓고 싶다.‘는 작가의 야심한 의도는 정확하게 먹혀들어갔다. 5명의 주인공의 입장(플러스 강아지 한 마리)으로 써 내려가는 플롯은 그들의 세계를 빈틈없이 탄탄하게 만들어 갔다. 이런 구조를 택한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 나는 서재형과 윤주의 음성을 들었고, 쿠키와 링고의 눈빛을 분명 보았다. 500페이지에 달하는 긴 장편소설이지만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잔인함과 생생함이란 재료를 정유정식 단문장으로 요리하여 엄청난 흡입력을 보였 주었다. 손에 놓을 수 없었고, 500장이 50장인 듯 아쉬워 쉽사리 종이를 넘길 수도 없었다.




정유정은 정유정이다.


<발췌>

윤주도 걸음을 멈췄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온몸이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찌하여 석 달이 지나서야 찾아왔는지 따져보라고. 당신에게도 그의 그림자가 무거웠는지 물으라고. 살아 있는 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거라 말하라고.

일순, 윤주를 향해 열려 있던 기준의 동공이 뒤흔들렸다. 유리창이 깨지듯, 와르르. 형체 없는 파편들이 윤주의 눈으로 날아와 박혔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기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스쳐 숲길로 올라갔다.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느릿느릿 걸었다. 동물 묘지로 들어선 후에야 슬쩍 뒤를 돌아봤다. 기준은 숲길 가래로 사라지고 없었다.


‘“재형 씨.”

그의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형 씨.”

세 번째 부름에서 재형은 윤주를 마주 보았다. 눈꺼풀이 열리지도, 눈동자가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느낌만은 분명했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다.

“나, 여기 있어.”

윤주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창백한 뺨을 감쌌다. 다음 순간, 손가락 사이로 재형이 빠져나갔다. 물처럼, 바람처럼, 시간처럼, 와서 머물다 간 세상의 모든 것들처럼, 형체도 감촉도 없이 그녀를 떠나갔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재형과 이마를 맞대고 엎드렸다. 목 안에서 뼈가 꺾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아마도 울음이었을 것이다. 물음이었을 것이다. 원망이었을 것이다. ‘왜 그랬어. 그러기 전에 한 번만 생각해 주지 그랬어. 이 무저갱에 혼자 남을 나를 한 번만.‘


소설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장면이다. 요즘 1인 창작물이 쉽게 발간되고, 밀리의 서재에 온라인 출판물도 많이 발간되는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지만 그들에게 죄송하다고 하는 게 정유정 작가님에게 오히려 죄송할 정도로 수준이 달랐다.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게 죄송할 정도였다. 왜 정유정이 정유정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묘사‘란 이렇게 하는 거란다.


자 이제 정유적 작가의 악의 3부작의 마지막인 종의 기원으로 떠나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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