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나요?
“여보, 아직도 정체성 못 찾았어?”
몇 달째 이 책을 만지막 만지작 거리는 나를 보며 남편이 말했다.
책을 관통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찾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첫 독을 했을 때는 단순히 사랑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에 읽히는 것 자체는 술술 읽혔다. 하지만 도통 왜 제목이 '정체성'인지에 대해서는 간파하지 못했다. 보고 또 보고 보고 또 보고... 전체적으로 다시 읽은 것은 아니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 굳이 이 장면을 왜 넣었는지 해석이 되지 않는 부분 등을 펼쳐보고 한 달 뒤에 다시 펼쳐보고.
그렇게 벚꽃이 핀 피던 날 시작한 이 소설은 여름 내내 나를 괴롭혔고 입추가 지나서야 드디어 끝을 맺었다.
나는 이 책을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다음 문장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정을 지속하는 진정하고 유일한 이유. 친구 사이의 옛일을 회상하며 끝없이 주절거리지 않는다면 이미 오래전에 지워졌을 과거의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한다는 점. p17
그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자아를 비춰 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 주는 것을 바랄 따름이지.....우정이 어떻게 생기는 걸까?’p54
이 소설은 '자기의 총체성(오타 아니다. 총체성 맞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정체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정체성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에 내가 없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총체성‘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정체성에 대한 시선은 주인공 남자 장마르크에 친구인 F에게서 볼 수 있다. F는 죽기 직전 장마르크를 만나고 그와 과거를 추억한다. 마치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잊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장마르크 또한 F와의 대화를 통해서 본인이 잊고 있었던 자신의 과거, 가치관, 생각, 관념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샹탈은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단순히 남자들의 알 수 없는 우정이라 치부하고 과거를 잊고자 전 남편을 잊기 위해 새로운 남자를 찾았고 아이를 묻었고, 시누이조차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본인이 했던 행동들을 부정하고 잊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샹탈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둔 순간까지도 불특정 다수들의 시선에 집착한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봐주는 한 '남자'가 있음에도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봐주지 않는다며 자신감까지 상실한다. 그들은 샹탈을 잘 알지 못한다. 단순히 알고 모르고의 수준을 떠나서 샹탈이라는 사람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그 사람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정말 음탕하고 불온 시선에 지나지 않는다.
샹탈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둔 내내 불특정 다수들과 그들의 시선’에 집착한다. 그리고 그 음탕한 시선을 기대하고 그 시선을 통해서 본인이 온전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막상 그러한 상황에 직면하자 급 피곤해져 버린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정면에 있는 그를 바라보았고 이처럼 커다란 혼란의 순간, 그녀의 육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물결이 솟구치면서… 알몸의 그녀는 온통 새빨개졌고 그녀 육체에 꽂힌 남자의 시선을 통해 그녀는 그녀 육체의 구석구석을 느낄 수 있었다… 육체 내면에서 타고 있는 불꽃은 어느새 그녀의 용기와 저항심을 태워버렸다. 갑자기 피곤해졌다. 갑자기 자기가 약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P176
‘소설의 마지막.
현실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그녀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녀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녀가 원하던 바로 그 시선인데도 말이다. 그때 그 순간 본능적으로 나를 기억해 주던 사람들을 애타게 찾는다. 아마도 그녀는 그때 F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자기를 부정하고 싶었던 샹탈도 결국 과거에 손을 빌린다. 그녀는 기억을 되살리려고 애썼다. 그녀에겐 세례명이 세 개 있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에 대한 생각이 되살아났다. 그가 여기 있다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줄 것이다… 이 남자를 통해 자기 이름을 되찾는 것이다…. P178
지금의 나는 어떻게 내가 되었을까? 과거에 내가 쌓이고 쌓여 현재 내가 되었을 것이다. 과거를 잊어버린다면 지금의 나는 더 이상 지금의 내가 아니게 된다. 부끄러울지 모르는 과거의 나도, 지금의 나도, 한결같을지 변할지 모르는 미래의 나도 나다.
과거의 내가 쌓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과거에 돌아가고 싶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나는 지금의 나도 좋기 때문에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부끄러울지 모르는 과거의 나들도 소중하다.
그리고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을, 흔들리지 않고 나로서 있게 해 준 그리고 앞으로도 있게 해 줄 각자의 장마르크가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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