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살고 싶다 III
전장의 참호엔 무신론자가 없다
종교생활에 대한 작은 생각
‘큰 나무 사이를 걸어갔더니 저절로 ’ 키가 커졌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것을 종교(신앙) 생활에 비유하고 싶다. 단지 나무 사이를 걸어갔을 뿐인데 주위의 큰 나무들처럼 어느새 내 키가 커졌다는…
사전에 보면 종교란,
‘무한(無限)·절대(絶對)의 초인간적인 신을 숭배하고 신성하게 여겨 선악을 권계하고 행복을 얻고자 하는 일을 말한다’라고 풀이되어 있다.
또 스티븐 케이브 박사의 ‘불멸‘ 에 대한 책과 강연들에서는 죽고 싶지 않은 인간의 오래된 욕망, 불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불멸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인류의 문명을 이끌어 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굳이 그 인기를 말하지 않아도 죽음과 불멸, 종교는 고대로부터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필생의 과제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보통의 평범한 우리에게는 잘 다가오지 않는 너무 어려운 개념이고 단지 우리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의 무게를 느끼며 그 앞에서 인간의 죽어야만 하는 숙명을 점차 받아들이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말했다. “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지 말라. 죽음보다 확실한 것은 없다. 인류의 역사상 어떤 예외도 없었다. 확실히 오는 것을 일부러 맞으러 갈 필요는 없다. 그때까지는 삶을 탐닉하라. 우리는 살기 위해서 여기에 왔노라”
그렇다! 인간은 살기 위해 있는 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는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죽는 것을 바라지 않고. 종교는 살기 위해, 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고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납득시킬 어떠한 근거도 없다. 여기에 종교의 신비성이 있다. 종교는 전연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신의 존재를 느끼면 다른 누구의 인정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또한 체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첫발을 내디뎌야 한다. 일단 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라. 그것이 어렵다면 현실적으로 생각하라. 무슨 종교이든 사이비 종교만 아니라면 ‘선‘ 이 궁극적 가르침이다.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가 인생에서 겪은 모든 실패와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바야흐로 내 인생의 초라함과 실패와 고통이 화려하게 부활하여 내 잘못이 아닌 운명적인 신의 한 ’ 수‘ 가 되는 것이다.
암 진단 후 나는 일단 정리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수술과 항암, 방사선까지 6개월의 긴 여정을 끝내고 서울을 떠나 근교의 조용하고 공기 맑은 곳으로 이사를 했다.
아쉽고 분했지만 – 나는 은퇴 후의 여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 여행, 취미생활 등
사람의 생사는 하늘에 달린 일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나는 죽음 앞에서 흔들렸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회자정리!
그러나, 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 뒤에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종교는 인류의 지혜이며 역사적 자산이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이다. 결코 무신론적인 사람은 못된다. 다행히 나는 모태에서부터 가진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죽은 후에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또 다른 세상을 보게 되리라는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이었다. 노아의 방주가 아라랏산에 닿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과연?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새로 이사 간 곳에서 성당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나는 안정을 찾아갔고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리하여 내 인생의 어둡고 아프고 쓰라린 시간과 기억이 가장 빛나는 날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만나는 “고통의 신비”다.
인간에겐 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2천 년 전에도 누군가는 돌기둥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보내는 기도를 새겼다. 어떤 책에서 무신론자가 ’ 아침 해를 보고 기도하는 ‘ 내용을 읽은 적도 있다. 가히 인류는 ’ 기도하는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알지 못하는 신이나 아침 해 보다는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알고 있는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보험이어도 괜찮다
왜 교회에 나오는가? 에 대해 일반 교회의 신자들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 죽은 후에 천국에 가려고(구원을 받으려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2.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3. 내세가 있는지 천국에 가는지에 의문이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 가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 진위는 잘 모르지만 개인 생각으로는 2와 3은 비슷한 맥락의 사고이라고 생각하면 3. 이 제일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엇이든 시작이 어디이었던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겨자씨가 자라나서 겨자 나무가 되는 것이다.
노년의 대안사회
노년은 일반 사회로부터 독립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사회(공동체)가 필요하다 -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 - 아리스토텔레스. 그러한 노년에게 ’ 대안사회‘로는 종교 공동체, 학교 동창회, 직장 OB회, 취미 공동체 등을 들 수 있다. 어떤 종교든, 불교든 그리스도교이든 이슬람이든, 같은 종교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기본강령에는 약자에 대한 보호가 포함되어있다. 노년은 사회약자로서 공동체의 보호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같은 이유로 거의 모든 종교 공동체에는 여러 모임이 있고, 모임을 중심으로 때때로 서로 안부도 묻고 도움도 받을 수 있다. 최근에 그 수가 늘고 있어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노인의 ‘고독사‘를 해결할 수 있는 한 방편도 종교단체의 공동체 활성화가 한몫을 할 수 있다.
늙음의 길은 낯설고 두려운 점에서는 누구에게나 다 같지만, 그 형태는 서로 많이 다른 생각과 가치관, 경제력, 생활환경으로 인해 개인적인 차이가 많다. 특히 멘토가 없는 노년의 삶은 자신에게 맞는 구체적인 맞춤형 라이프스타일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자-나누자, 베풀자
인간의 가치는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소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가 가진 것을 나누고 베푸는 가에 따라 정해진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일상에 매어 남의 일에 관심을 갖기가 어렵다. 젊은 시절에는 특히, 내가 사는데 바빠 주위에 눈을 돌리기가 어렵고, 모든 관심이 내가 잘살고 잘되는 데에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시간적으로나 마음으로나 주위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 이때 자신만의 생활에서 벗어나 주위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따뜻한 마음, 재능과 지식 그리고 재물을 남을 위해 기꺼이 내어 놓아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해보려는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러나 아직도 별생각 없이 자신만의 일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나, 마음은 있으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 체력적으로 만이 아니라 뇌도 심장도 기능이 저하되면서 사고의 영역도 좁아지고 마음도 완고(딱딱)해지기 쉽다고 의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마음을 써서 노력하지 않으면, 베풀기보다는 받기를 좋아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기 쉽다는 뜻이다.
주위에서 봉사활동에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나서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나이보다 젊어 보이고 매사에 긍정적이며 좀 더 자주 행복감을 느끼고 미래에 대해 불안보다는 기대에 차있고 세상에 대해 밝고 낙천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는 우리가 노년에 가져야 할 삶의 이상적인 자세인 듯하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관심을 기울이고, 서로 돕고 함께 나누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기쁨이다. 젊은 나이에도 가능하지만, 삶이 저물어가는 노년에 더 빛나고 아름다운 기쁨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노년은, 아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축복이고 멋진 일이 될 수 있다.
현실에서는 그러나 마음은 있으나 봉사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은듯하다. 일단 주위를 돌아보라. 누군가 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 나서 보라! 백문이 불여일견(百聞 不如一見)이다. 아니면 주위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나 장소가 있는지 수소문하라. 종교가 있다면 그곳의 봉사 단체에 함께하라. 마음만 있다면 길은 보인다.
고령사회에서는 4가구에 1가구는 노령가구다 - 노년의 봉사활동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어야 한다. 젊은 층의 감소로 젊은이들에게만 노년의 취약계층의 돌봄을 맡기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더 건강한 노년이, 도움이 필요한 노년을 돌보는 ‘노노(老老) 돌봄’ 시대이다.
봉사를 함에는 허심탄회해야 한다. 무슨 큰 도움을 준다거나 내 재능을 발휘해 보겠다거나 하는 마음이 앞서선 안 된다. 하물며 감사를 받으리라는 기대는 해서는 안 된다. 아무 도움이 안 될지라도 그냥 함께 하겠다는 작고 소박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어떤 이유로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데 동참하고 싶다는 단순하고 간소한 바람을 가져야 한다.
인도에서의 오랜 봉사활동으로 유명한 마더 테레사는 말했다.
네가 오늘 선을 실천하더라도
내일이면 잊혀 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선을 실천하라.
네가 가진 최고의 것을 주라,
물론 그것은 결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최고의 것을 주라….
봉사나 자선이나 연습이 필요하다. 개인차가 있으나 보통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힘든 봉사활동이나 큰 자선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저 적은 돈, 사소한 활동으로부터 시작하게 된다. 내 주위의 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종교 잡지를 구독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인가부터 자신의 것을 1년간 신청하면서, 1부를 더 신청하여 교도소나 어려운 사정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잡지에는 매달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알리며 도움을 청하는 칼럼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매달 작은 액수의 금액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또 교회의 봉사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이렇듯이 처음 시작은 작은 돈, 사소한 자선부터 시작되어 점차 그 내용이 확대되어가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시작하고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