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프 행어

퀸스 갬빗, 그 시절 정글이야기

by 헬렌

마트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지름길로 접어들었는데, 좁은 길이라 앞에 차가 서 있었다. 잠시 뒤에서 기다리다가 앞차가 출발하고 함께 출발하는데 막 차에서 나온 남자가 왠지 낯이 익어 보였다. 그 남자도 돌아서다가 나를 본 듯 잠시 멈칫하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 저녁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았을 때 갑자기 그가 누군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누구였는지가 기억이 났다
그리고 30년 전에 그 일의 전모가, 그 일 속의 숨겨져 있던 사건과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바퀴가 돌듯이 풀려나왔다


1화. 아버지가 사라진 밤

잠결에 무슨 소리인가에 깨어 일어났다..

"민지야."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엄마? 왜 이 밤중에?"

"아버지가... 아버지가 안 계신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슨 소리예요?"

"편지만 하나 놓고 가셨어. 회사가... 부도가 났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곤 가슴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어머니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아버지의 악필이었다.

'미안하다. 회사가 부도났다. 채권자들이 집으로 올 것이다. 민지야, 네가 이제 가장이다. 동생들 부탁한다.'

편지를 읽는 내내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 너무 커서 감정이 마비된 것 같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막내 민수가 울고 있었다.

"언니..."

14살짜리가 울면 안 되는데.

나는 민수를 안아주지 못했다.

내가 울까 봐.

.

"언니, 우리 이제 어떻게 돼?"

민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른다고.

나도 무섭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장이라는 건 그런 거였다.

두려워도 모른다고 말할 수 없는 자리.

"괜찮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분했다.

"언니가 다 해결할 게."

어떻게?

나도 몰랐다.

그냥 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채권자들이 몰려왔다.

"김 회장 어디 있어요!"

"빚 갚아요! 5억이에요, 5억!"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동생들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안 계십니다."

"뭐? 도망갔어?"

"연락도 안 돼요. 저희도 피해잡니다."

중년 남자가 나를 노려봤다.

"따님이 책임지셔야 하죠. 집이라도 팔아서.."

"이 집은 이미 은행 담보로 잡혀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라고!"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희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채권자들이 돌아간 후, 나는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스물다섯 살.

대학 졸업한 지 1년.

백수.

아무 능력도 없는.

그런 내가 가장이라고?


민지야, 내가 아는 사람한테 연락해 볼 게.

교수님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외국은행인데, 지금 직원 뽑는다고 들었어."

정말 요?

응. 근데 쉽지 않을 거야. 경쟁률이 어마어마하거든."

그래도 한번 해보고 싶어요

그래, 내가 부지점장한테 추천장 써 줄게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준비하면서 마음도, 손도 떨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게 우리 가족의 마지막 기회였다.


면접 날.

검은 정장을 빌려 입었다. 이미 취업한 친구에게 부탁해서 빌린 정장이었다

거울을 봤다.

창백한 얼굴.

거울 속의 나는 어둡고, 자신 없어 보였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나는 뺨을 한 대 쳤다.

"정신 차려, 김민지."

시험은 오전에 필기시험, 오후에 타이핑시험과 면접이 있었다.

필기시험은 그런 데로 준비한 데로 치렀지만, 타이핑시험은 준비기간도 짧았고, 그 당시의 타이프라이터는 귀한 물건으로 연습할 곳도 없었다. 게다가 너무 긴장해서 오타, 오타, 미칠 것 같았다.

면접장에 들어갔다.

외국인 2, 한국인 남자 1명이 앉아 있었다.

앉으세요.

감사합니다.

먼저 중앙의 외국인은 지점장이고 옆의 외국인은 새로 한국에 지점을 오픈하러 온 매니저라고 소개를 했다. 한국사람은 관리부서책임자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중년의 한국사람이 먼저 물었다 "김민지 씨, 학점이 좋네요. 3.8?

네.

근데 공백 기간이 있는데, 무엇하셨나요?

순간 목이 메었다.

공백 기간.

그냥 백수였다고 말할까.

아니면 솔직하게 말할까.

나는 고개를 들고 영어로 대답했다.

"...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일할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집안 사정?"

지점장이 물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했습니다. 제가 이제 가족을 책임져야 합니다."- 어제부터 영어로 준비해서 연습해 온 말이었다.

침묵.

긴 침묵.

"그래서 이 일이 꼭 필요하신 거군요." 젊은 외국인 매니저가 말했다.

"네. 저는 열심히 일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나이 지긋한 지점장이 아무 말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결과를 기다리는 2주간이 2년보다 길었다.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

가슴이 뜨거워졌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출근하시면 됩니다."

"네,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고,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었다..


그날 밤, 나는 일기를 썼다.

'오늘부터 나는 가장이다.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한다. 우리 집 생활비를 벌어야 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일기장을 덮으며 생각했다.

이제 시작이다.


첫 출근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났다.

어제 다려논 정장을 입고 집을 나섰다

출근길 지하철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고 서서 창밖을 봤다.

기차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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