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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 Chuisle May 12. 2017

<목소리의 형태> 들리진 않아도, 느낄 수 있어

소통을 위해 노력하기

"매우 비슷한 사람들간에 이질감이나 적대감이 형성되는 이유는 아주 사소한 차이 때문이다"                                - Sigmund Freud-
저는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니시미야 쇼코가 전학을 온다. "자기소개해야지"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묵묵부답인 쇼코는 청각장애인이다. 니시미야에게 호의적이었던 친구들(우에노, 이시다, 카와이, 시마다)의 관심은 날이 갈수록 폭력성으로 변질된다. 결국 수면에 떠오른 왕따문제. 왕따를 주도했던 이시다는 친구들의 배신으로 외톨이가 되고 니시미야는 다시 전학을 간다. 서로가 쌓아두었던 것들이 모두 무너진 상태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등학생이 된 그들은 초등학교의 아픈 기억과 이시다의 죄책감을 구심점으로 다시 모인다.


 영화<목소리의 형태>에서 니시미야와 이시다가 왕따를 당한 근원은 [소통의 부재]에 있다. 안타깝게도 니시미야와 이시다는 각자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소통의 문이 닫힌 상태였다.


 니시미야와의 소통의 문을 열기 위해선 필담 노트, 더 나아가 수화라는 열쇠가 필요하다. 때문에 니시미야와 소통하려면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우에노,사하라와 이시다가 취하는 태도는 상이하다.

 더 이상 다가오지말라는 사인을 보냈는데도 너가 계속 다가왔잖아. 너가 우리들이 쌓아온 걸 무너뜨렸어.                                              -우에노-

 니시미야와의 소통을 위한 수화 수업에서 우에노가 "저는 필담노트에 쓰는게 편한대요?" 라고 반문하자 선생님은 "니시미야는 수화가 편해서그래요."라고 답한다. 수화를 배우지 않으려는, 소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우에노의 태도는 소통의 부재로 이어지고 결국 왕따 문제를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반대로 사하라는 "선생님, 저는 수화를 배울래요."라고 말하고 수화를 배우려고 노력한다. 이시다도 고등학생이 되어 수화를 배운다. 다가서려는 이들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맺지만 그 사이에는 먼저 해결해야 하는 걸림돌이 있었다. 먼저 상대방이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


 영화에는 두 번의 자살시도가 등장한다. 극 초반 이시다, 극 후반 니시미야의 자살시도. 이시다와 니시미야는 둘 다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다. 이시다는 왕따 가해자라는 죄책감으로, 니시미야는 자신과 같이 있는 사람은 모두 불행해진다는 죄책감으로 본인은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고등학생이 된 이시다와 니시미야는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


 아파트 난간에서 뛰어내린 니시미야는 목숨을 던져 자신을 구해준 이시다를 보고 그제서야 자기가 괴물이 아니라, 사랑받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걸,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소통의 가능성'을 연다.


 초등학교 이후 마음의 문을 닫은 이시다의 눈에 보이는 학교 친구들의 얼굴에는 모두  'X' 테이프가 붙여져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왜곡되어 들리고 이시다는 자신을 점점 고립시킨다. 니시미야를 구해주고 대신 떨어진 후 퇴원한 이시다는 축제에서 진정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연다. 모든 X테이프가 떨어진 것이다. 그제서야 이시다는 친구들의 목소리, 진심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X

 결국 소통에는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다가서려는 노력과 받아들이려는 노력 모두를 의미한다.

 "하지만 말야, 이시다 군. 난 있지. 우정이란 말이나 이치, 그러한 것들을 넘은 것에 있다고 생각해."               - 나가츠카(이시다의 친구)

 극 중 나가츠카는 윗 말과 함께 친구에 자격같은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굳이 친구의 자격을 꼽으라면  '소통하려고 노력해준 사람'이 아닐까? 나가츠카를 괴롭힘에서 구해주려고 노력한 이시다는 나가츠카와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수화를 배운 사하라와 이시다는 니시미야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너, 나, 친구

 서로에게 상처를 가득 안겨준 친구들이 다시 모여서 그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었던 건 그들이 다시 소통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소통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있도록, 진정한 이해와 사랑이 가능해지도록 만들었다.


 우리는 가끔 마음속으로 멜로디를 상상하면서 박자를 두드려놓고는 상대방이 이 노래를 맞추기를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심지어 자작곡을 맞추라고 하는 급일지도 모르겠다. 다행스러운 건 목소리에는 형태가 있기에 진심은 결국 전해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니시미야가 이시다에게 준 선물도, 이시다에게 한 고백도 결국엔 전해진 것처럼 말이다.

"들리진 않아도, 느낄 순 있어"  -니시미야 쇼코

 이처럼 소통은 그저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이면서 진심을 전달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배는 다가가고 항구는 열어둬야 한다. 소통하려는 노력은 언제나 기브앤 테이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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