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발리로 떠났습니다. 요즘 이런 분들 많죠? 2년 동안 발리에서 주야장천 서핑만 하다가, 한국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아직은 여유 있는 전원생활 중입니다. 다시 언제 될지 모르는 발리 생활의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네요. 기록해 두지 않으면 그저 사회의 공백 2년으로 남을 것 같아서, 급히 정리해봅니다. 나에게 남겨진 발리의 흔적들
여유와 낭만이 있는 발리에 돈은 없었다. 아주 적은 월급으로 매달 보험료를 내고 나면 정말 밥값만 남았다. 아무리 물가가 싼 발리라고 해도 기본 생활을 하는데 자꾸 마이너스가 났다. 근데 그냥 그렇게 살아졌다. 먹고, 자고, 서핑 하면서.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없이 살았다.
서울에서는 돈이 있었다. 직장생활로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먹고 싶은 음식 다 먹을 수 있을 만큼 벌었다. 물론 월급이라는 돈이 있었다는 것이지 저축은 없는 삶이었다. 무절제한 나의 소비 습관은 한달 월급을 그대로 카드사에 이체하는 수준이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소비했는지 밝히는 것은 부끄럽지만, 카드를 쓰기 시작하면서 VIP가 됐다. 연말 정산할 때 일년 카드 값을 모아보면 그냥 내 연봉이었다.
크게 과소비한 것은 없었다. 비싼 물건을 산 것도 아니라 참 억울하다. 계획 없이 기분에 따라 돈을 쓰다 보면 다 그런 법이다. 그래도 빚은 안된다는 나의 신념에 따라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살았다. 그때 미래의 나를 위해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더 많은 기회를 얻었을 텐데 아쉽다.
나의 소비는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이뤄져 씀씀이가 매우 컸다.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 원피스를 사면 구두가 사고 싶었고, 비싼 화장품도 써야 했다. 운동은 꼭 PT를 받아야 했고, 운동복도 사야 했다. 소비하기 위해 사는 삶이었다. 월급을 받기 위해 일을 하고 일을 하러 가기 위해서 돈을 쓰는 삶. 걷는 걸음걸음마다 카드가 지나갔다.
나의 소비 습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을 소비한 것 같다. 사회적으로 이정도는 해야 하는, 이정도는 갖춰야 하는, 이정도는 입어줘야 하는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내가 어느 순간 설정한 기준과 수준을 맞추기 위한 소비가 많았다. 그 습관은 발리에서도 이어졌다. 새로운 수영복을 아주 많이 샀고, 발리에서 필요하다며 옷도 새로 샀다. 휴가 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 사회적 기준에 맞춰 휴가 온 사람처럼 돈을 쓰고 살았다.
돈을 벌기 위해 간 발리는 아니었다. 쉬고 싶었고, 다른 경험을 하고 싶어서 떠났다. 휴가와 삶 그 경계에 있었다 나는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당시의 내 소비수준은 혼자 휴가를 떠났다. 사실 발리의 월급은 6분의 1 수준이었다. 월급에 맞춰 소비는 조정되지 않았다. 한국 월급에 맞춰진 매달 내야 하는 보험과 같은 고정 비용도 있었다.
수입 대비 지출이 높은 마이너스 상황이 이어졌다. 발리 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모은 몇 달의 월급으로 초반에는 그냥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퇴직금을 쓰면 된다는 그런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그때는 했다.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난다면 아주 크게 궁딩이를 때려줄 것이다.)
최대 1년 정도로 생각한 발리 생활은 길어지고 삶이 되었다. 내 잔고는 퇴직금까지 아주 탈탈 털어지고 있었다. 발리 1년이 지나서야 위기감이 들었다. 이미 빨간 불이 들어온 아주 늦은 상황이었으며, 그제서야 내 소비 습관을 조정하게 됐다.
부끄럽지만 발리의 첫 일년 동안은 남은 잔고가 있으니 내가 어디에 얼마를 쓰고 있는지를 생각을 못했다. 계획성 없는 소비를 하다 보니 돈이 술술 사라진 것이다. 위기감을 겪은 이후 우선순위를 정하고 돈을 쪼개서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려고 하니 그제서야 많은 것들을 바꿀 수 있었다.
돈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꼭 나가야 하는 보험료, 그리고 먹는 것 외에는 돈을 쓸 일이 없었다. 뭐가 사고 싶을 때는 필요해서 사고 싶은 것인지, 기분 내려는 것인지를 오래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사실 없으면 없는 것으로 그냥 산다. 사람이 살면서 생각보다 필요한 것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직접 해 먹는 재미를 붙이다 보니 외식할 때 보다 절반 이상 돈을 절약할 수 있었다. 발리에서 쓰는 돈은 장 보는 돈, 밥 사 먹는 돈, 서핑 할 때 쓰는 돈, 그리고 없다. 기분에 따라 돈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돈을 쓰게 됐다.
물론 발리에서 완벽하게 수도승처럼 산 것은 아니다. 맛있는 것도 먹었고, 가끔 비키니도 샀고…? 기분도 내긴 냈는데, 과거의 소비 습관과는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마이너스라서 항상 속상해하긴 했지만, 소비의 우선순위를 진짜 체득했다.
그리고 ‘이정도는 해야 할 것 같다’라는 마음에서 이뤄지는 소비들에게 완벽하게 벗어났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정도는 필요한’ 마음에서 생겼던 사회적 소비들은 더 이상 없었다. 나도 모르게 외부적 시선으로 봤을 때 맞춰줘야 하는 기준을 만들어 뒀던 것이 사라졌다. 그냥, 나 자신에 대해 더 집중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물욕들이 사라졌다. 물론 뭐든 있으면 좋지만 이렇게까지 내가 많이 가져야 하나 라는 생각을 했다. 발리에서도 옷이 너무 많았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발리에서 입던 옷과 다르게 격식이 필요한 자리에 갈 옷을 사야 할까 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미 나에게 있었다.
물질적으로 이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삶을 서핑이라는 운동에 단순화해서 살다 보니, 내가 필요한 것과 가진 것에 대해 조금 분명해졌다. 그렇게 얻은 흔적은 지금 한국의 삶에서도 이어진다. 올해 목표는 옷을 사지 않는 것이다. 이미 있는 많은 옷들을 활용하고 안 입는 옷들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서울에서도, 발리에서도 왜 그렇게 빨간 깃발에 직진하는 눈 먼 황소처럼 살았는지 모르겠다. 나 자신을 정확히 모른 채, 누가 설정한지도 모르는 깃발로 직진을 했다. 그리고 당장 현재의 나를 너무 중요시해서 모든 문제를 ‘미래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라는 아주 철없는 짓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현재에 충실히 살다 보니 과거의 나를 통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됐다. 그리고 소비에 있어 나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었다. 이제는 집에서 노트북을 가지고 글을 써서 돈을 벌고, 현재의 내가 아닌 미래의 나의 시간을 위해서 저축을 한다.
욜로를 위해 떠난 나는 나에 대해 집중하고, 나를 위한 소비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깨닫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