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How I Met Your Mother, HIMYM)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등장인물로 마셜 에릭센 (Marshall Eriksen)이 있습니다. 마셜을 서류 상으로 접할 때와 영상으로 보았을 때 드는 느낌은 사뭇 다릅니다. 먼저 그의 이력서를 짧게 나열해보겠습니다. 마셜은 미국의 명문 리버럴 아츠 칼리지인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고 컬럼비아 로스쿨을 나온, 대형 은행 출신의 유능한 변호사이자 판사입니다. 딱 저 한 줄과 사람들의 선입견을 더해보았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냉정하고 냉철하며, 때로는 냉랭하기까지 한 엘리트의 그림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드를 보신 분이라면 아시겠지만 마셜이 아홉 시즌 동안 보여준 모습은 전혀 딴판입니다. 서른 중반을 넘어서도 유령과 예티의 존재를 (살짝 걱정될 정도로) 철썩 같이 믿고, 10년의 연애 후 결혼한 아내와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안절부절못하며 (그런데 왜 야근의 상징 같은 직장들만), 모르는 전화번호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절대 무시하지 못하는 반전 매력의 소유자입니다. 실제로 미국 시청자들의 열띤 토론에 의하면 마셜의 MBTI는 INFP라고 의견이 모입니다. (ENFP라는 의견도 있지만 필자는 전자에 동의하기 때문에 뇌피셜로 위와 같이 결론 내리겠습니다). 대국민 MBTI 과몰입 시대에 잘 정리된, INFP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직업에 꼭 속하는 것 중 하나가 법조인인데 아니다 다를까 마셜은 시즌 내내 자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퇴근 후의 그를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안쓰러운 점은 한 둘이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갈등을 싫어하는 마셜은 거절도 어려워하고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기도 힘들어할 뿐만 아니라 필요 이상으로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성격의 소유자입니다. 경쟁과 전쟁으로 점철된 법조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물론 미드는 다큐멘터리가 아니기 때문에 작중에서는 이러한 의문점을 깊이 파헤치지는 않지만, 이번 글에서는 마셜이라는 인물을 콕 집어내 그의 행동과 생각들을 얕게나마 진지하게, 얄팍하게나마 과학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이미지 출처: imdb.com
내향인의 뇌를 들여다보면: 회색과 도파민
사실 극 중 마셜이 집돌이 같은 모습만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로스쿨 파티에도 잘 참여하고 테드와 바니의 이상한 모험? 에도 곧잘 따라다니는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셜의 이런 일 밖 사회 활동에 테드, 바니, 릴리, 로빈 네 명이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드라마니까 그렇다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편한 사람과 있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내향적인 성향이 강한 이들의 뇌를 열어보면 분명 공통점이 한두 개 즈음 있지 않을까요? 전 세계 석학들의 연구 결과, 최소한 세 가지 특이점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각각의 발견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전두엽 (prefrontal cortex)에 회색질 (gray matter)이라고 불리는 부분이 유난히 발달되었다는 점입니다. 전두엽은 추상적인 사고와 의사결정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부위이며 회색질은 뉴런의 세포체 등이 밀집되어 있는 정보 처리 공간을 뜻합니다. 추상적인 사고와 의사결정의 영역에서 정보 처리가 상대적으로 많이 일어난다는 의미이지요. 내향적인 이들에게 “넌 생각이 너무 많아!”라고 말할 때, 정말로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생각이라 일컫는 신호들이 사방으로 튀고 있는 셈입니다. 또한, 도파민 (dopamine)이라고 하는 신경전달물질에 대한 민감도가 외향인들에 비해 높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추구하는 가치들, 이를테면 돈이나 명예, 이성과 같은 것들을 원하는 이유는 도파민에 의해 매개되는 보상 회로 때문입니다. 이 보상 회로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하면 중독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도파민은 알코올이나 마약 등과 항상 같이 등장하는 신경전달물질 이기도 합니다. 내향인들은 외향적인 사람들에 비해 이 도파민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공간이나 시끄러운 소리 등의 자극을 어려워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내향인은 자극이 주어졌을 때 상대적으로 긴 아세틸콜린 회로 (long acetylcholine pathway)가 주로 활성화되기 때문에 판단과 행동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합니다. 정보가 뇌를 지나가면서 몇 군데 들리지 않으면 모르겠는데, 공감에 관여하는 right frontal insular, 기억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 hippocampus, 언어와 말하기를 담당하는 Broca's area 등 너무나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생각의 과잉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미지 출처: https://quietrev.com/6-illustrations-that-show-what-its-like-in-an-introverts-head/
착한 아이 증후군과 people pleaser
다시 HIMYM으로 돌아오자면, 마셜은 착해도 너무 착합니다. 미드 특성상 우리나라 정서와 100% 맞지 않는 등장인물들이 많은데, 마셜만큼은 호불호가 크게 갈리지 않을 정도로 작중 가장 정상적이고 선한 인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셜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직접적으로 해치는 특성은 아니지만, 자기 자신을 안에서부터 갉아먹는 오류입니다. 바로 위에 언급한 “착해도 너무 착하다”라는 점입니다. 확실히 마셜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타인의 반응을 굉장히 세심하게 챙기고 생각을 오래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이 덕분에 그의 말과 행동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의 마음에 쏙 드는, "착한" 결과물로 나타납니다. 어렸을 때 읽었던 수많은 전래동화나 만화영화에 의하면 착함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가치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점점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이 생각은 뒤틀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셜과 같은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성향을 바꾸기 어렵고, 현대 어른의 사회에서 조금 겉도는 모습을 보입니다. 많은 에피소드에서 드러나는 마셜은 전형적인 people pleaser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의견에 무조건 동의하고 보고, 싫다고 말하기 굉장히 어려워하며, 타인의 감정에 책임감을 느끼고 갈등을 피합니다. 더불어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특이하게도 people pleaser를 우리말로 번역하려고 하면 하나의 통일된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유래된 “착한 아이 증후군”이 가장 비슷한 용어라고 생각하는데, 이 역시 과도하게 타인을 의식하고 본인의 선호나 의견을 제시하기 어려워하는 상태를 지칭합니다. 다만 착한 아이 증후군의 원인으로는 어린 시절 부모의 잘못된 양육 방식이 주로 지목되는데 마셜의 유년시절은 작중 거의 완벽할 정도로 정상적으로 그려진다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은 양육 환경과 상관없이 주변에 대한 예민함이 배가 되는 천성을 타고난 걸까요? 조금 더 생물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고 신경 쓰는 것과 관련된 유전자도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번 글에서는 길게 들어가기 어렵지만 실제로 그렇다고 합니다! 아마 마셜 또한 타인에 대한 배려와 눈치가 문자 그대로 몸에, 더 구체적으로는 DNA에 배인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마셜처럼 살아가기
시트콤의 특성상 마셜의 이야기 역시 해피 엔딩으로 끝납니다. 원하던 대로 판사가 되어 훗날 뉴욕 주 대법원장의 위치까지 올라가고, 사랑하는 와이프 릴리의 꿈을 위해 이탈리아로 다 같이 이사를 가기도 하며, 세 명의 아이의 아버지가 됩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위와 같이 극적인 성공이 보장되기 어렵겠지만 마셜이라는 허구의 인물로부터 배울 지혜는 충분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가장 귀감이 되는 그의 태도는 “초심”을 아끼는 낭만이라고 느꼈습니다 .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원대하고 이상적인 삶의 목표를 세웁니다. 하지만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혹은 현실과 타협하면서 점점 자신이 설정해놓은 길에서 이탈해 어느새 뒤를 돌아보면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셜 또한 자신의 성격 때문에 좌절하고 실패도 많이 겪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과 함께 초심을 잃지 않는 마음으로 결국에는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현실과 드라마는 다르다고 치부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조금 인식을 바꿔서, 우리의 삶도 한 편의 드라마로 아직 미완결이기 때문에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뿐이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언젠가는 다가올 피날레까지 포기하지만 말고 계속해서 나의 장점과 신념을 지켜내어 나가면 마셜처럼 마지막에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맨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마셜은 본 작품에서, 더 나아가 지금까지 본 미드 통틀어서 가장 아끼는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의 행동과 대사에서 드러나는 선함과 올곧은 마음을 소개하면서 감정의 뇌과학에 대해 조금만 더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
참고문헌
1. Holmes et.al.,Individual Differences in Amygdala-Medial Prefrontal Anatomy Link Negative Affect, Impaired Social Functioning, and Polygenic Depression Risk, Journal of Neuroscience, 12 December 2012
2. M.Laney, The Introvert Advantage: How Quiet People Can Thrive in an Extrovert World, Workman Publishing,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