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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3. 2021

당신이 모델 하우스를 볼 때 잊고 있는 것

"사모님, 옆 동네 새 아파트도 매물로 나와 있는데 한번 안 보실래요?"


신도시라서 입주를 앞둔 새 아파트도 매물로 많이 나와 있었다. 요즘은 세금 문제 때문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입주 전 아파트는 매물로 나오지 않는 것 같던데 당시만 해도 분양권에 프리미엄을 얹어 파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그토록 부러워 한 '청약운'이 있는 이들인 셈이다. 이곳에 정착할 생각도 전혀 없으면서 분양에 당첨되어 막대한 프리미엄을 얹어 파는 이들이, 실거주할 집을 알아보는 입장에서 마냥 예뻐 보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도 투자라고, 당신이라도 이런 기회가 오면 붙잡지 않겠냐고 반문한다면 투사도, 사회 운동가도 아닌 입장에서 딱히 반박할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분양은 진짜 거주할 사람이 당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집 갖고 투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게 사회 전체 생산성이 향상되는 길 같지도 않고 말이다.


새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기 전에 예비 입주민들이 해당 아파트를 사전 점검하는 날이 있는데, 한번은 부동산에서 이날 찍은 동영상을 보여 줬다. 부동산 사장님이 화면을 구석구석 손으로 가리키며 아파트 내장재가 얼마나 고급인지, 구조가 얼마나 잘 빠졌는지 말씀해 주셨다. 같이 보던 다른 손님이, "역시 새 아파트가 진리야!"라고 말했다. 사지는 못해도 구경이라도 하라며 꼭대기층 펜트 하우스도 보여 주셨다. 복층으로 이루어진 펜트 하우스는 고급스러운 내부는 물론 통유리 너머 조망까지 근사해서 아파트라기보다는 특급 호텔 같았다.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배경처럼 무심히 인부 아저씨가 나왔다. 아직 마감이 끝나지 않았는지 영상 한 귀퉁이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거실 바닥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뭔가 작업 중이었다. 한여름이었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었을 리 없는 공사 중 아파트 실내는 화면으로 보기만 해도 후끈한 더위가 몰려드는 것 같았다. 가만가만 걸으면서 영상만 찍는 진행자도 땀이 흐르는데 계속 손발을 놀리며 바닥에 웅크리고 있는 인부 아저씨 티셔츠는 몸에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땀범벅인 상태였다. 그제야 아파트도 사람이 짓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잊고 있었다. 사람이 사는 곳을, 사람이 짓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그는 평생 일해도 못 살 집을 평생 짓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신축 아파트 모델 하우스에 갔을 때 단정하게 쪽머리를 한 행사 요원들이 "이 부엌은 주부들 동선이 최소화될 수 있게 최고의 디자이너가 설계한 공간입니다"라고 말하며 그들이 얼마나 실력 있는 디자이너인지 치켜세우며 설명했다.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유현준 교수는 아파트 모델 하우스는 그 집이 담을 창밖 풍경은 배제한 채 내부 구조에만 집중하게 만든다고 지적하며 그러다 보니 부엌 동선이나 현관 보조 좌석 같은 사소한 이유가 대단한 장점으로 부각된다고 덧붙였다.  


모델 하우스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건 또 있다. 누군가의 설계 도면이 우리 눈앞에 실제 집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흙을 퍼내고 돌을 날라야 한다. 굴착기와 덤프트럭이 같은 길을 수없이 오가야 하며 그 또한 누군가 운전해야 한다.  이 모델 하우스와 똑같은 수십, 수백 개의 집이 누군가의 노동 없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너무 당연해서일까?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유독 몸 쓰며 일하는 사람들의 노고를 헤아리는 데 인색한 것 같다. 어릴 때 밥 먹기 전에 종종 엄마가, "남기지 마, 농사짓는 게 얼마나 힘든데. 농부들이 고생해 준 덕에 이렇게 밥 먹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학교에서 도시락을 먹기 전에도(당시엔 급식이 없었으니까) 선생님이, "오늘도 도시락 싸 준 엄마한테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농사짓는 분들한테 고마운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라고, 종교에서 하는 '식사 전 기도'와 비슷한 의미를 지닌 말씀을 매번 하셨다. 사회는 대체적으로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성숙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믿는 나지만 이 부분만큼은 예전이 더 나은 것 같다.


건물을 짓는 일이든, 농업이든, 어업이든 결국 돈 받고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인데 굳이 감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살면서, 서로의 수고를 살피고 감사하는 데에 박하게 굴 이유가 있을까? 대상에 따라 태도가 달리지는 것도 그렇다.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도 돈 받고 일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그들의 수고는 모델 하우스 내레이터의 입을 통해서 한번 칭송이라도 되지만 직접 손발을 놀려 일하는 사람들은 기억해 주는 이도 없고 한 술 더 떠 다짜고짜 멸시하는 이들까지 있다.


<임계장 이야기>에서 경비 일을 하는 작가는 어떤 아빠와 아이가 지나가며 하는 이야기에 충격을 받는다. 음식물 쓰레기통을 치우는 작가를 보며 "경비 아저씨가 힘들겠다"고 걱정하는 아이에게 아빠가 "응, 너도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그러니 열심히 공부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더러운 음식물 쓰레기를 아무도 치워주지 않는 돼지우리 같은 세상이 와야 그런 말이 사라질까? 설계 도면은 수없이 쌓이는데 땀 흘려 일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진리'라는 새 아파트를 짓지 못하게 되면 좀 달라질까? 아무리 AI 세상이 와도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 있다. AI 시대에 단순 노무직은 설 자리를 잃는다며 미래를 예견하는 똑똑한 사람들이 정작 현재 누구에게 고마워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Photo by Kam Idris on Unsplash

스위스 융프라우에 갔을 때 하늘로 치솟은 설산을 가로질러 달리는 산악 열차도 놀라웠지만, 개통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알파인 센세이션'에 당시 공사했던 인부들 사진이 큼직하게 전시된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높은 분들의 준공식 테이프 커팅 사진이나 돈 댄 사람들 명단을 새긴 돌덩이를 전시할 법한 곳에 인부들이 구슬땀을 흘리는 현장 사진이나 모여서 활짝 웃고 있는 단체 사진이 있었다. 일하던 와중에 찍은 사진이라 갖춰 입지도 않았고 오래되어 얼굴도 희미하게 보이는 빛바랜 사진이었지만 그들의 땀과 노고에 바치는 헌사 같은 사진들이었다. 100여 년 전, 이렇다 할 첨단 장비도 없이 터널을 뚫고 선로를 놓은 그들을, 스위스 사람들은 오래도록 기억하고자 했다.


아마 100 년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지 않았을까? 해발 3000미터가 넘는 산에 철도를 놓는 엄청난 공사에 16년간 매달린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산악 열차가 운행될  있었다고.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사고 없이 운행된 열차 덕분에 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물론 막대한 관광 수익도 올리고 우리가  많은 것을 누리게 되었다고.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가 딸에게 대를 거쳐 조곤조곤 말해 주지 않았을까? 사진을 보며 그런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 어딘가에 온기가 퍼진다.  열차가 품고 있는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 수고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것으로 그들의 삶은  풍성해졌을  같다.


동영상으로 살펴본 아파트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쾌적하고 깨끗한 지금 아파트를 보러 왔을 때 수목원만큼 잘 가꿔진 단지 내 정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무슨 아파트 대회 조경 부문에서 상도 받았다며 관리사무소에서 걸어 놓은 플래카드도 눈에 띄었다. 시간이 흘러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다음에 종종 아파트 정원을 한 바퀴 돌면서 산책을 즐겼다. 하늘거리는 갈대를 쓰다듬으며 어느새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데 어디에선가 "좀더 잡아당겨! 좀더!"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차가운 날이었지만 일하는 사람들 얼굴은 땀으로 번들거렸다. 가만히 보니 인부 아저씨들이 소나무 수형을 잡느라 지지대를 세우고 고정하는 작업 중이었다. 안 그래도 집 보러 왔을 때 탄성을 자아낼 만큼 크고 멋스러운 소나무들이 있어서 남편과 한참 올려다봤었다. 동양화 한 폭을 옮겨 놓은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그림은 거저 주어진 게 아니었다. 소나무가 기울어지거나 제멋대로 뻗어나가지 않도록 계속 수형을 가다듬는 여러 사람의 손길이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큰 소나무이기에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수형 잡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워 보였다. 다들 달라붙어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집을 보러 왔던 한여름, 바깥에서 서 있는 것도 고역이었던 날씨에 챙 넓은 모자를 둘러 쓰고 정원에 삼삼오오 쭈그리고 앉아 수풀을 정리하던 이들도 떠 오른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쳐 봤는데 소나무 수형 잡는 데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는 걸 보니 내가 수목원 같은 정원을 즐길 수 있는 건 이 분들의 수고 덕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수고를 환기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도 이롭다. 정원을 거닐 때, 늦은 밤 자전거를 타고 주차장을 순찰하는 경비 아저씨와 마주칠 때, 아파트 배관을 수리하느라 구정물을 뒤집어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기사 아저씨를  볼 때,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누군가의 돌봄과 헌신으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내가 타인의 신세를 지는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절 때마다 우리 가족 먹을 전을 맞추는데 이제는 한 세트 더 맞춰서 매번 경비실에 드린다. 요리에는 젬병이라 내가 만들어서 드리지 못 하는 게 아쉽지만 예쁘게 포장된 오색 전 세트를 건넬 때, "아이고, 이게 뭐예요" 함빡 웃으시며 받는 모습에 추석 보름달만큼 마음이 꽉 차오르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 관리사무소에 가끔 음료수를 사다 드린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보수공사 안내문에 "감사합니다"라고 썼더니 옆자리에 "저도 입주민인데 늘 감사합니다"라고 누군가 이어서 써주기도 했다. 이럴 때면 우리가 생각보다 긴밀하게 연결된 느낌이 든다. 돈 받고 하는 일이라며 감사하지 않고 버틸 때 앙상하고 볼품 없어지는 건 자기 자신일지 모른다.


우리의 시간과 수고는 필연적으로 휘발되고 사라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영화 <노매드랜드>에서 주인공 스왱키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한동안 살던 마을을 떠나지 못 한다. 남편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인 자신마저 그곳을 뜨면 남편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희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기억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가 아닐까. 기억이 부질없다고 하지만 기억조차 없는 인생은 공허하다. 타인은 다 무의미한 것처럼 말하지만, 타인을 배제한 삶은 타인에게 빚지고 사는 자신도 부정하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보장해 주느라 한쪽 어깨를 내어준 사람들을 잊지 않는 행위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왕이면 혈육이 아니고 내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수고를 나는 더 많이 기억하고 싶다. 내가 남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이타심이 많아서라기보다 혈육처럼 도움을 주고받는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 관계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재차 확인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다.

더구나 최근의 사회적 흐름을 보면 '나와 내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가족 이기주의가 거세지고, 집 또한 자식에게 재화를 물려주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여기에 나까지 목소리를 보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노고야 나 아니더라도 관심 가져주는 이들이 많을 테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기 꺼리는 일을 하는 분들의 노력과 정성을 한번 더 챙겨보려 한다. 그분들의 고생은 무대에서 빗겨 나 있기 때문에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놓칠 수 있다.


인생이 풍요롭다고 느끼는 순간은 내가 대단한 업적을 이뤘을 때보다는 내가 더 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기억하게 될 때이다. 타인을 향한 기억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행복해지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청약운'을 부러워하기보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준 타인들의 '노력운', '헌신운', '배려운' 같은 것을 본받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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