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계발서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당신이 겪고 있는 인생의 모든 문제는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강변하는 점입니다.
오래전에는 돈 찾을 때 은행 창구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지금은 가물가물하지만 한참씩 서 있던 기억이 나요. 다리가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누군가는 줄 서서 기다리는 게 유난히 어려울 수 있고 그 시간이 아까울 수도 있어요. 노약자는 서서 기다리는 것도 제법 큰일이고요.
이런 상황에서 줄 서 있는 개인들에게 좀더 열심히 줄을 서라고 닦달하는 게 자기 계발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리가 아픈 것도 평소 근력을 키우지 않은 네 탓이고, 이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고 싶으면 서서라도 책을 읽으면 된다고 호통치는 느낌이랄까요. 목발을 짚고 꿋꿋하게 서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치켜세우며 불리한 여건을 딛고 이런 성공신화를 쓰지 못하는 건 다 네 탓이라고 훈수를 두겠지요.
그런 논리보다는 합리적인 시스템을 마련하는 게 이 사회에 훨씬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은행 대기표 시스템이 생기면서 불필요하게 서서 기다려야 하는 수고가 없어졌으며 그 시간에 의자에 안락하게 앉아 책을 읽거나 좀더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됐습니다.
자기 계발서의 또 다른 문제는 모든 인간이 단일한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길 소망하고 모두가 지위가 높아지길 꿈꾼다고 전제합니다.
스웨덴에 사는 지인이 서점에 갔을 때 자기 계발서라는 게 전혀 없어서 놀랐다고 해요. 문학책만 가득해서 자기 계발서와 재테크 서적이 베스트셀러 상단에 위치한 우리나라 서점 풍경과 너무 다른 게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복지가 잘 갖추어진 북유럽 국가니까 그런 건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경제 규모도 과거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1인당 국민소득도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다고 하는데 오히려 자기 계발서가 더 넘쳐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경제가 성장한 만큼 욕망이 커진 탓일까요. 사람들은 더 호사스러운 삶이, 곧 더 큰 행복이라는 등식에 쉽게 동조하고 더 많은 자본을 갖지 못한 걸 두고 초조해하는 것 같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불안>에서 '속물'을 '하나의 가치를 지나치게 떠받드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우리가 한 사람을 바라볼 때 흡수하게 되는 정보는 사실 다양하지요. 그가 어떤 계절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어떤 화제를 이야기할 때 활기가 넘치는지, 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린 많은 정보를 취합하게 됩니다. 그러나 속물이 되면 하나의 척도만 작동해서 사람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불가능해집니다. 재산이 많은지, 지위가 높은지, 집을 소유했는지, '자본'이란 척도만 적용해서 상대를 판단하게 되면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인간적 진실 같은 건 중요해지지 않게 됩니다.
어떤 면에서 문학이란 것도 자기 계발서의 일종일지 모릅니다. 어쨌든 더 가치 있게,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독자는 문학을 읽고 작가들은 독자와 그 길을 찾아보겠다고 작품을 쓰는 것 아니겠어요. 시중에 넘쳐나는 자기 계발서와 문학의 다른 점은, 문학은 단일한 잣대로 사람과 세상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독자에게 답을 주기보다는 질문을 찾아내도록 안내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자기 계발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사람이지만 인생에서 '하면 된다' 같은 주문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데는 동의합니다. 인생은 늘 고매하기는 힘들어서 사기꾼이든, 유명 자기 계발서든, 너도 할 수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속삭임을 해주는 대상이 절실할 때가 있긴 합니다.
처음 책을 쓴다고 했을 때 가까운 사람 순서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남편이나 친정 가족처럼, 분명히 나와 제일 가깝고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제일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책은 아무나 쓰냐고, 고생해서 원고를 썼는데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마음만 다칠 거라고 걱정했어요. 설혹 책이 나와도 내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냈다가 상처 받을지 모른다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을 두고 이런저런 염려를 쏟아냈습니다.
그때 책 쓰기 특강 같은 걸 두어 번 들었는데 강사님이 "무조건 원고를 완성하는 게 먼저"라고 강조했습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이것저것 재지 말고 일단 원고지를 채워나가라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런 이야기는 나도 하겠다며 그분이 말만 앞세운다며 좋게 보지 않았어요.
따지고 보면 그분은 적절한 시기에 제게 가장 필요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석 달간 미친 듯이 원고에만 매달려 첫 책이 나왔고 1년여의 시간 후에 두 번째 책까지 출간했습니다. 출판사에 투고해서 책이 나올 확률은 3%밖에 안 된다는 통계에 지레 겁먹고 시도하지도 않았다면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책입니다.
얼마 전 진로 고민을 하는 큰아이와 대화를 나눴는데 저도 모르게 아이가 가려는 길에 얼마나 많은 난관이 있는지 설명하고 있더라고요. 그쪽 길은 진입이 너무 어려워, 이 전공을 한다고 해서 그 분야로 취업이 보장되지도 않아,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소득이 거의 없기도 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이야기만 하자 아이가 지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엄마, 알아, 나도 안다고. 어려운 길인 거 안다고. 그런데....좀 된다고 말해 주면 안 돼?"
아이의 애타는 눈망울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이거 내가 예전에 남편에게 보낸 눈빛인데. 남편도 분명히 저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서 "네가 책을 어떻게 쓰겠다는 거야"라고 걱정부터 했어요. 저를 능력이 없거나 모자란 존재로 봐서가 아니라 행여 상처 받을까 봐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말했습니다.
그때 저도 간절히 바랐습니다. 좀 된다고 말해 주면 안 되는 걸까? 이제 막 도전하려는 아이 앞에 필요한 사람은 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현실적인 걱정만 늘어놓는 엄마가 아니라 아무튼 너는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기꾼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른 채 "너도 부자 될 수 있어"같은 주문에 휘둘린다면 단일한 잣대로 세상을 판단하는 속물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내가 바깥세상과 어떤 방식으로 맞닿아야 하는지 구상이 명확하고, 어떤 나를 만들어 가고 싶은지 머릿속에 그림이 있다면 그때 필요한 건 된다는 믿음입니다. 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우군입니다. 혹여 사기꾼이라도 말이지요.
(물론 아무리 믿어도 안 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에 나온 문장을 생각하려고요. '어이없고 하찮은 우연이 삶을 이끌어간다. 그러니 뜻을 캐내려고 애쓰지 마라. 삶은 농담인 것이다.' 낙담하는 대신 간절하게 원해도 안 된 일은 농담처럼 훌훌 털어내고 내 인생에서 필요한 또 다른 사기꾼을 찾아 나서면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