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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Nov 17. 2021

베이비샤워를 보며 나이 든 여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오래전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베이비샤워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바다 건너 먼 나라의 풍습이지만 부럽다고 생각했다. 아기 낳기 전에 지인들이 선물과 덕담을 건네는 광경이 훈훈하고 따스해 보였다. 저런 파티도 해주다니 산모도, 뱃속의 아가도 참 행복하겠다. 혼자 미소 지으며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만 봤던 다른 나라 풍습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도 돌잔치처럼 흔하게 '베이비샤워' 파티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우연히 베이비샤워 동영상을 봤다. 친구들이 산모 모르게 '깜짝 베이비 샤워 파티'를 준비하고 이를 알게 된 산모가 놀라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하던 산모가 베이비샤워라는 걸 알고 너무 좋아서 손뼉을 치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주인공이 된 것처럼 들뜨고 설렜다.




예전에 미혼모와 아기를 돌봐주는 종교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다. 사회 문제를 두고 입바른 소리를 곧잘 하던 나였지만 고백하건대 편견이 있었다. 미혼모는 어떤 얼굴과 표정일 거라고, 머릿속에 정형화된 모습이 있었다.

시설에서 그녀들을 만났을 때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수하고 해맑은 또래들이랑 전혀 다를 게 없는 모습이라 놀랐다. 가끔 스무 살도 안 된 산모도 있었는데 말하는 걸 보면 어떤 면에서는 제 나이보다 더 순진했다. 아기는 사랑스러웠고 붙임성 있게 곧잘 말도 거는 그녀들도 내 딸처럼 예뻤지만 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면 마음이 무거웠다. 가족이나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그녀들이 1년 뒤에 시설을 나가 마주할 세상이 얼마나 차갑고 시릴지 생각하면 이렇게 잠깐씩 와서 아기를 봐주는 일밖에 못해주는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녀들도 인터넷에서 베이비샤워를 찾아봤을까. 보면서 부러웠을까. 임신을 두고 축하를 받기는커녕 가족이나 연인, 혹은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들어야 했던 심정은 어땠을까. 나 또한 대단한 비련의 주인공이 된 것도 아니었는데 임신을 그다지 축복받지 못했다고 느꼈을 때 내내 울었던 기억이 있어서 더 남일 같지 않은 걸까.


신혼 때는 남편이 아직 학생 신분이라 임시교사를 하며 받는  월급이  수입원이었다. 양가에서 가끔 도움도 주셨지만 결혼해서 독립한 마당에 마냥 지원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우리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썼다. 남편 실험실에서 연구비가 나오긴 했지만 이래저래 수입을 합쳐도  사람이 여유 있게  정도는 아니었다. 적금도 하고 미래도 준비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 손으로 살림 일구는 보람 있었다. 임신은  년간 미루고 자리 잡는  힘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Photo by Madhuri Mohite on Unsplash


예상치 못한 임신을 했을 때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반갑고 벅찬 마음도 들었다. 임신으로 내가 일을 못하게 될 것 같아 시부모님께는 왠지 죄송한 마음으로 임신 소식을 알렸다. 겉으로나마 축하해 주실 거라 생각했는데 임신했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갑자기 식탁 위에 정적이 감돌았다.

한참 뒤에야 시어머니가 "아, 그랬구나! 어쨌든 축하!"라고 짧게 말씀하셨다. 돌이켜보면 학생 부부면서 대책 없이 임신을 한 상황에 어른들은 속이 답답했을 것 같다. 수입도 없으면서 어쩌려고 그러나 철없어 보였을 거다. 그럼에도 그 종결어미도 없이 끝난 짧은 축하 인사가 왜 그리 서운하고 서럽던지. 좀더 일찍 자리 잡지 못한 엄마아빠 때문에 먼길 건너 세상에 오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반갑다고 인사도 못 듣는 건가, 아기한테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어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연신 눈물을 훔쳤다.


남편이나 가족 없이 임신한 것도 아닌데 축하 인사 좀 흡족하게 못 들었다고 그렇게 몸속에 있는 물을 다 빼내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끝없이 울었던 걸 생각하면, 임신을 확인한 스무 살 전후 어린 그녀들이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얼마나 두려웠을지, 두려우면서도 또 얼마나 외롭고 서글펐을지 짐작하기도 힘들다. 축하를 못 받았다고 울고불고했지만 나는 1년 뒤에 아기 돌잔치도 호텔에서 꽤나 근사하게 열었고 아기는 색동저고리를 입고 많은 친척들에게 축하를 받았다.




알록달록 예쁜 풍선이 가득한 베이비샤워 파티 사진을 보며 베이비샤워는 꿈도 못 꿨을 어린 엄마들을 떠올리는 건 무슨 마음일까. 젊었을 때는 내가 누리지 못한 걸 생각하며 살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남이 누리지 못한 걸 헤아리며 살게 된다. 조금은 시기했던 누군가의 기쁨은 세월 속에 잊히는데 미처 돌보지 못한 누군가의 슬픔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아직 애 티도 벗지 못했던 엄마들과 민들레 홀씨보다도 더 연약하고 보드라웠던 아기들이 이 코로나 시국에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자꾸 생각하게 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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