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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Feb 02. 2021

당신이 보지 못하는 것들

아침이면 당신과 아이들을 보내고 난 다음 난장판이 된 집안을 봅니다. 한숨부터 나오고 어디서부터 치워야 할지 잠시 고민한 다음 식탁을 대강 치우지요. EBS에서 방영되는 <생방송 부모> 소리를 크게 키워놓고, 잰걸음으로 아이들 방과 마루를 오가며 정리를 합니다. 쌓여 있는 빨래를 갤 때도 있고요.     


한참을 치우다 보면 커피 한잔 생각이 나지요. 잠시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봅니다. 이때가 유일하게 내가 좀 마음 놓고 쉬는 시간이지요. 얼마 전에 사회적 이슈를 모르는 나를 두고 아주 무식한 아줌마 취급하는 당신을 보고 무척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신문도 챙겨 봅니다.     


하지만 당신이 몰랐다고 핀잔주던 사회적 이슈는 이미 나오지 않습니다. 눈코 뜰 새 없이 팽팽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 혼자 오래된 골동품처럼 뒤지고 마모되는 느낌이 또 한 번 밀려듭니다.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도 없이 나는 다시 종종걸음으로 집안을 돌아다닙니다. 그릇들을 식기 세척기에서 빼고 넣고를 반복합니다. 싱크대도 닦고 가스레인지 위도 닦습니다. 냉장고 안도 닦습니다. 식기 세척기 위와 레인지 앞도 대강 닦습니다. 닦아도 닦아도 금방 뽀얗게 먼지가 앉는 그곳들을 나는 수시로 닦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당신이 와서 ‘먼지 구덩이 집안’ 운운하면 눈물이 납니다.     


아이들 반찬을 하려고 시금치를 물에 담가놓고 고구마 껍질을 까놓습니다. 이런 간단한 집안 일도 아이들이 오면 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엄마 품이 그리웠던 둘째는 오자마자 곁에 있으라고 아우성치고 역시나 엄마와의 시간이 아쉬운 첫째도 수시로 엄마에게 와서 이건 무슨 글자냐, 이 그림을 따라 그려달라, 이것 좀 꺼내 달라, 잠깐만 같이 놀아달라 요구사항이 많습니다.     


부엌 바닥을 닦고 화분에 물도 주고 옷도 개고 하다 보면 또 금세 시간이 흘러 점심때가 지납니다. 엄마가 늦게 오면 너무 슬프다는 첫째 아이 말을 생각하며 서둘러 찬밥을 레인지에 돌리고 아침에 먹다 남은 반찬에 대강 끼니를 때웁니다.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허겁지겁 거울도 한번 제대로 못 보고 유치원을 향해 달려갑니다.     

엄마를 보고 활짝 웃으며 반가워하는 첫째를 데리고 모처럼 샌드위치를 사줍니다. 엄마와의 시간이 너무나 즐거운 아이를 보면서 미처 해놓지 못한 집안일을 어떻게 하나 잠시 걱정도 합니다. 큰아이와 시간을 보내다 보면 작은아이 데리러 갈 시간입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작은아이에게 엄마를 기다리느라 힘들었냐며 안아 줍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 들어가면서부터 또 시작입니다. 엄마를 밑에 깔고 앉아서 꼼짝 못 하게 하는 둘째를 달래 가며 미처 못 한 집안일을 합니다. 목욕탕 머리카락도 버리고 장식장 먼지도 닦고 아이들이 수시로 가는 베란다 바닥도 다시 닦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첫째와 둘째가 싸웁니다. 달려가서 아이들이 싸우지 않도록 달래고 각자 놀만한 거리를 찾아줍니다. 둘째는 옷자락을 잡으며 잠시만 같이 놀아달라 합니다. 잠깐 놀아줍니다.     


사진출처 unsplash


그렇게 오가며 아이들을 살피며 못 끝냈던 청소를 하고 저녁 준비를 합니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으면 둘째는 수시로 와서 떼를 부립니다. 양념장을 열어 물엿을 먹겠다고도 하고 냉동실을 열어 통깨를 달라고 합니다. 때로는 자기를 안으라며 찬장 안에 있는 코코아를 꺼내어 타 달라고도 합니다. 반쯤은 들어주고 반쯤은 밥 먹어야 하니 참아야 한다며 달래다 보면 시간은 자꾸 흐릅니다. 큰애는 배고프다고 하는데 일은 빨리 진척이 되질 않습니다.     


이럴 때면 6시에 신랑이 들어온다는 철수 엄마도 부럽고 신랑이 요리를 잘한다는 영희 엄마도 부럽습니다. 큰애와 작은애를 번갈아 달래 가며 간신히 저녁밥을 차립니다.     

부쩍 떼가 는 작은애가 엉겨 들어 차분하게 밥 한 숟가락 입에 넣기가 힘듭니다. 그 와중에 친구와 다툼이 있었던 큰애의 속상한 이야기도 듣고 달래줍니다. 어찌어찌 저녁을 먹고 나면 목욕을 시켜야 합니다. 몸은 천근만근. 딱 누워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간신히 목욕을 시키고 나면 때로는 큰애 유치원 숙제를 봐줘야 하고 학습지 숙제를 도와줘야 합니다. 그것도 작은애의 끊임없는 방해와 훼방을 달래가며, 혹은 혼내가며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잘 시간. 종일 작은애의 방해를 받아 스트레스를 받은 큰애가 책 읽는 데 또 작은애가 건드리자 폭발합니다. 큰애를 나무라자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다시 큰애를 달래주고 서운해하는 작은애도 또 달래줍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네이버 블로그를 보면 어쩌면 그렇게 살림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능력까지 겸비한 여자들이 많은지 내 모습은 한없이 작아집니다. 텔레비전을 봐도 신문을 봐도 책을 봐도, 일도 잘하고 가정도 잘 건사하는 훌륭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쏟아집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면서도 자꾸만 움츠러드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늦게 퇴근한 남편이 들어옵니다. 단추 달아 달라고 한 게 언젠데 아직까지 안 달아놓았냐며 짜증을 냅니다.     


아무 말 없이 돌아서지만 사실 마음속에 눈물이 쏟아집니다. 주부란 무엇일까요. 난 무엇 때문에 직장도 그만두고 당신을 따라 이 낯선 곳에 내려온 걸까요.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주부에게 야박하더군요. 당신도 예상과 달리 별반 다르지 않고요. 책을 읽으면 한가하게 시간 보낸다고 합니다. 다른 애기 엄마를 만나 차를 마시면, 아줌마들이 쓸데없이 수다만 떤다고 합니다. 소통이 그리워 인터넷을 하면 하라는 집안일은 안 하고 컴퓨터만 한다고 합니다. 집안일에 파묻혀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둔해지면 왜 그렇게 무식하냐고 무시합니다. 난 뭘까요.     




아주 오래전에 썼던 글을 책상 정리하면서 찾았어요.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 같네요. 남편에게 보여주려고 써서 출력까지 했었지만 결국 곱게 접혀 서랍 속에만 머물러 있던 글입니다. 지금은 남편도 많이 달라졌고 저 또한 변했지만, 문득 궁금해서 잠자던 글을 깨워 올려봅니다. 요즘 아기 엄마들, 젊은 부부는 제가 처했던 상황과 많이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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