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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an 20. 2021

파일관리자에서 사진을 삭제했을 때 일어나는 일

“저장 용량이 부족합니다.”


또 알림이 떴다. 갤러리 정리를 미루고 미뤘더니 걸핏하면 핸드폰 용량이 부족하다는 알림이 뜬다. 핸드폰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고 자꾸 뭐라 한다. 휴일 아침을 차리느라 바빴다는 건 핑계일 거다. 사진을 지우는 게 귀찮아서 후딱 지울 생각에 ‘파일 관리자’로 들어갔다.

한 손은 잡채를 뒤섞으며 한 손은 핸드폰을 든 채, 건성으로 화면을 훑어봤다. 폴더 몇 개를 지웠다. 며칠 전에 다운로드한 파일이 많았던 기억이 나서 다운로드 폴더를 지운다는 게 어째 너무 여러 개를 선택한 느낌이 들긴 했다. 잡채를 접시에 옮겨 담고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갤러리에 들어가 봤다.     


“?”

텅텅 비어 있다. 네 개 폴더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달랑 한 개 폴더만 남아 있다.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찔한 생각에 급히 남편을 불렀다.

“물어볼 게 있어! 핸드폰 파일 관리자에서 삭제한 사진은 복구 안 되나?”

“휴지통에 있겠지.”

“갤러리에서 지우면 휴지통에 있지. 그런데 이건 처음 지운 건데도 휴지통에 없어.”

“그래? 잘 찾아봐.”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급하게 인터넷을 뒤졌다. 서비스 센터에 가라는 이도 있고 전문가를 찾아가서 간신히 복구했다는 이도 있었다.      




어떡해!

지운 사진들이 도대체 무슨 사진이었을까? 왠지 그 안에 중요한 인생 사진이 잔뜩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사진이 없어졌는지 알고 싶어서 남은 사진들을 뒤졌다.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유럽 여행 사진이었다. 싸이월드에서 백업해 놓은 사진들, 아이 졸업식 사진도 잘 있나 살펴봤다. 일부는 남아 있었다. 하지만 찍어만 놓고 일일이 확인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진들, 그리고 신문기사나 SNS를 보다가 중요한 정보라고 생각해서 캡처해 놨던 내용은 몽땅 없어졌다. 어림 잡아 만 장이 넘게 사라졌다.     


마음을 가다듬고 온라인 카페에 ‘복구’라는 단어를 넣어 검색을 시작했다.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어떻게 복구했나 참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구’란 단어로 검색된 사연은 다양했다.     


"업무 관련 중요자료들을 컴퓨터에 저장해 놨었는데 뭘 잘못했는지 싹 삭제되고 휴지통에도 안 남아 있어요. 너무 놀라서 손이 덜덜 떨려요. 어떻게 복구하죠?"

아,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오래전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가 원고가 날아가 버린 노트북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복구 업체를 찾아가자 극 속에서 ‘백업도 안 해놔요?’라고 심드렁하게 묻던 직원이 생각난다. 캐리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나 몰래 모두들 백업을 하고 산단 말인가?’ 경악했었지.     


"전셋집인데 세척기 설치하느라 떼어낸 걸레받이를 복구해 놓고 가야 해요. 방법이 있나요?"

"아이가 전셋집 벽에 낙서를 했어요. 주인이 이거 복구해 놓으라고 할 텐데 부분 도배가 될까요?"

집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 흔적이 남는다. 먹고 떠들고, 사랑하며 울고 웃은 삶의 체취는 휘발될 때는 아름다울지 몰라도 어딘가 흔적으로 남을 때는 골칫거리가 되기도 한다. ‘복구’라는 단어를 쳤을 때 의외로 많이 나온 사연이다.     


"남편 정관 수술했는데 셋째 생각에 다시 복구하고 싶어요. 가능할까요?"

비혼과 비출산이 트렌드로 떠오르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복구라니, 왠지 사연을 자세히 읽기도 전에 그녀가 존경스럽다. 사람들의 다양한 복구 사연을 읽다 보니 핸드폰 사진이 없어진 내 사연은 그나마 가벼운 축에 속하는 것 같다.      


사진출처 unsplash


돌이켜 보면 디지털 세상에서 나의 흔적이 사라진 일이 처음은 아니다.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 프리챌, 인티즌, 드림위즈 등 커뮤니티와 메일 서비스를 제공하던 많은 업체가 온라인 세상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덩달아 그 플랫폼에서 주고받은 메일, 게시글과 대화, 사진 모두 없어졌다.     

 

오랜만에 접속했더니 아예 없는 사이트라고 나올 때 느꼈던 황망함.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누구랑 무슨 메일을 주고받았는지, 내가 속한 커뮤니티는 뭐였고 그 안에 올린 게시물 중 인상적이었던 건 뭐였는지 생각했다. 수백 건이 쌓인 메일함이 사라졌는데 기억나는 건 열 건 정도였고 하나라도 더 떠올려 보려고 컴퓨터 화면을 노려봐도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기억을 되살려 복기해 봐야 크게 의미가 없는 메일들이었을지 모른다.     


요즘 젊은 사람들 표현을 빌자면 ‘썸타는’ 누군가들과 주고받은 메일을 두고두고 간직해 봐야 뭐하겠는가. 아이 둘 재워놓고 혼자 보는 것도 민망한 노릇이고 그렇다고 남편과 ‘공유’할 만한 추억도 아니다. 젊은 시절, 업무차 주고받던 메일을 보면 과거에 내가 열정적으로 일했다는 걸 한번 더 환기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메일을 수시로 열어 봐야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닐 것이다. 커뮤니티에서 사람들과 주고받은 게시물 속에서 번뜩이는 기지를 발휘한 나에게 잠깐 뿌듯할 수는 있지만 그 또한 혼자 흐뭇하게 추억에 잠기는 일일 뿐이다.     


이렇게 대수롭지 않은 거라 생각하면서도 메일함이나 사진, 인터넷에 올렸던 글이 사라질 때면 왜 그리 머릿속이 하얘지고 암담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게 내 몸이 기억하는 과거의 사람들과 사연을 떠올릴 매개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누군가는 그 사람이 읽는 책이 그의 현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대변한다고도 한다. ‘기억’은 어떤가. 기억이 곧 일까.  영화나 드라마에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인물은 기억을 찾아 헤매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라고 하소연한다. 기억을 잃었다는 설정은 보통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상징이다.


기억이란 건 점점 소멸해 가고 과거의 나는 자꾸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나마 과거에 쓴 글이나 사진에는 내가 남아 있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사람들 심리에는 과거의 나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기억하고 지키고 싶어 한다.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과거의 자신을 좋아하고 기특하게 여기는 경우는 별로 못 봤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릴 때 뿌듯해하기보다는 회한에 젖는다. 한치의 후회도 없이 지나날 너무 잘 살았다고 단언하는 이들보다는 ‘그때 내가 더 좋은 대학에 합격했더라면, 면접을 잘 봤더라면, 결혼을 안 했더라면 (혹은 했더라면), 주식을 샀다면, 더 열심히 살았더라면’ 등등 현실적으로 후회스러운 일을 열거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회한 가득한 과거라도 망각하고 싶지는 않나 보다. 더구나 사진으로 남긴 인생의 장면은 특별한 순간이 많다. 원해서 간 대학이 아닐지라도 그때 신입생 환영회의 한 장면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고, 샀다가 공연히 손해만 보고 팔아버린 집일지라도 그 집 소파에 앉아 있던 올망졸망한 아이들 사진은 간직하고 싶은 거다. 모처럼 갔던 나들이 길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길거리에서 부부가 싸웠을지언정 그 길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을 보며 ‘이때 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 웃으며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인 거다.


사진이나 메일, 오래전에 올렸던 커뮤니티의 내 글은 세속적인 성취와 상관없이 과거 나의 한 부분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오래도록 품고 싶어 한다. 우린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지 모른다. 세상은 현실적인 성공만을 기억하지만 나는 나의 모든 서사가 소중하다는 걸, 그 서사가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라는 걸 말이다.   

  



삭제한 사진들은 결국 복구하지 못했다. 서비스 센터와 복구 업체를 찾아갔지만 다들 ‘파일 관리자’에서 삭제한 파일은 복구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서울의 유명 업체에서 말로만 듣던 ‘포렌식’ 기법으로 복구할 수도 있다며 핸드폰을 택배로 부치라고 하긴 했다. 대신 바로 핸드폰을 끄고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용량이라는 건 제한되어 있는데 자꾸 쓸수록 핸드폰에 새로운 기록이 입력되느라 지워진 파일과 사진에 더 손상이 갈 수 있다면서.


잠깐 고민했지만 어쨌거나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사진들은 남아 있고 무엇보다 핸드폰을 바로 꺼야 한다는 말에 망설여졌다. 일주일간 아무것도 안 하고 누구와 연락도 못 하고 지낼 텐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쉽지만 이번 기회에 백업을 소홀히 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대신 빈 공간에 새로운 장면과 추억을 쌓기로 결심했다. 산 날날 중 뭐가 더 많을지 알 수 없는 중년의 문턱을 지났지만, 지나온 시간들에 이어갈 새로운 나의 서사가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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