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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n 08. 2023

서로에게 친절할 이유는 충분하다


고등학교 동창이 거물급 정치인의 딸이었어요. 학교 다닐 때는 몰랐어요. 하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 애가 유복한 집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걸 눈치챌 수 있었어요. 사춘기 아이들, 외모에 한창 관심 많잖아요. 그 애는 외모도 눈에 띄는 데다가, 외국에서 살다 와서 영어도 잘하고 늘 구김 없이 밝았거든요. 지금이야 외국 생활 한 애들이 흔하지만 저희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해외여행도 자유화되기 전이었어요. 하물며 오랜 기간 해외에 거주했으니 그 애는 그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지요.


어느 날 그 애가 하소연하듯이 말했어요. 외국에 있을 때는 집에서 한국말만 쓰라던 부모님이, 한국에 오니 집에서 영어만 쓰도록 시킨다며 부모님 때문에 피곤하다고요. 집에 가면 영어로 대화할 수 있는 우아한 엄마랑 학교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는 그 애 모습이 그려졌어요.

그 애와 달리 집에 가면 돈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부모님을 봐야 하는 저의 처지가 갑자기 궁상맞게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생각했죠. 그 애의 인생에는 이런 장면이 없겠지? 이렇게 구질구질한 현실 같은 건 까맣게 모르겠지? 저와는 다른 세상 사람 같았어요. 같은 반 학급 임원이라 얽히는 일이 많아 비교적 가깝게 지내면서도 이상하게 끝내 친해지지는 않았어요. 그 애가 저에게 거리를 둔 건지, 자격지심에 지레 제가 그 애를 멀리 한 건지, 기억은 잘 안 납니다.


세월이 흘러 중년에 이르러서야 그 애가 거물급 정치인의 딸이고 그 애는 물론 그 애의 동생까지 문화 예술계에서 큰 활약을 하는 걸 알게 됐어요. 그렇게 되기 힘들다는 영화감독, 연극 연출가로서 자매가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듯했습니다. 영화나 연극 분야에 제가 직접 종사한 건 아니지만 건너서 듣기로는 정말 밑바닥 스태프부터 몇 년을 배곯아 가며 고생해야 '입봉'할 수 있을까, 말까, 불확실한 세계의 최고봉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제가 보기에는 자매가 별 어려움 없이, 이렇다 할 고생도 안 하고 자기 작품을 내는 위치에 섰다는 게 처음에는 신기했다가 나중에는 씁쓸했습니다. 어린 시절, 출발선이 다른 데서 느낀 설익은 좌절감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어요.


며칠 전 작은애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이야기를 나눴어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들의 개인사를 알아서 오히려 그들의 작품을 순수한 눈으로 볼 수가 없다고 말해줬어요. 그렇게 부족함 없이 산 자매가 소외된 이들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작품에 담아낸다는 게 어딘지 가식적으로 보이고, 고통이란 걸 모르며 컸을 것 같은 창작자가 남의 고통을 제대로 조명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고요. 남들은 그렇게 어렵다는 입봉 코스를 인맥 덕인지 너무 쉽게 뚝딱 건넌 것처럼 보인다는 설명도 해가며 혼자 열변을 토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가 느끼는 감정이 뭐지는 알 것 같아. 나도 그런 느낌 들 때 있거든. 뭔가 좀 불공평하고 답답하기도 한 그런 느낌.... 그런데 엄마가 늘 말하지 않았어? 고통은 줄 세울 수 없다고. 엄마는 그들의 개인사를 알기 때문에 더 모순이 느껴진다고 말했지만 사실 엄마가 알고 있는 개인사란 것도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일 수 있어.


언젠가 내가 물었잖아. 나 정도면 남들이 보기엔 충분히 행복하고 가진 게 많은데 내가 힘들어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나약한 사람이 아닌지 걱정이라고 했을 때 엄마가 그런 비교는 의미가 없다고 했어. 나의 고통은 나만이 아는 거라고. 그러니 그렇게 마음을 검열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인맥 같은 게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영화감독이나 연출가가 되기 어려운 시스템이지, 그들이 남 보기에 쉽게 그런 위치에 다다랐다고 해서 그들은 어떤 고통도 없었다고, 그러니 그들은 고통을 말할 자격도 없다고,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까? 겉으로는 아무런 걱정이 없어 보여도 그 사람들도 살면서 괴로운 때가 있었을 거야. 그러니 시스템을 문제 삼을 수는 있어도 그들을 뭐라 할 수는 없는 것 같아.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닌데 말이야."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어쩌면 어린 시절 정리하지 못한 채 넘어간 열등감이 되살아났던 탓일까요. 타인의 인생 속사정을 다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평가하는 걸 평소에 경계했건만, 어쩐 일인지 또 그물망 밖으로 발을 헛디뎠습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 생각에 얼마나 허점이 많은지 느꼈어요. 일단 어떤 경로로 감독이나 연출가 위치에 이른 건지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막연하게 능력을 검증받지 않고 인맥으로 됐을 거라고 전제했어요. 부정을 저질러 그 위치에 다다른 것도 아닌데 불신을 기본값으로 뒀습니다. 아이 말대로 고난이나 시련이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데 그들은 무중력 세계에서 깃털처럼 가볍게 떠다니며 살았을 거라고 단정했고요.


어릴 때부터 돈돈 거리는 엄마의 푸념에 귀를 틀어막던 저는, 오랫동안 돈을 혐오했어요. 부모님이 싸우는 것도 돈 때문이었고 엄마가 우릴 보며 너희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막말을 하는 것도 돈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풍족하게 크지 못했는데도 성인이 된 다음에 악착같이 돈 버는 거에 오히려 무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순간 제가 '돈'이란 말뚝에 묶인 채 주변을 빙빙 돌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경제적으로 윤택해야 그 아이처럼 화목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클 거란 확신이 지나쳐 물질적으로 풍요하다면 불행의 그림자 한 조각도 드리워지지 않았을 거라고 믿어버리는 거죠. 지금은 큰 부자는 아니어도 과거 궁상맞게 느끼던 시절과는 삶의 모습이 꽤나 달라졌는데 아직도 저는 열등감에 구겨진 어린 소녀를 마음속에 담아두고 사나 봅니다. 제 아이가 누구에게나 삶은 고될 수 있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야 이런 깨달음을 얻네요.


부조리한 사회 구조에서 기인한 빈부 격차나 상대적 박탈감은 성인도 힘들지만 어린아이에게는 더 해석이 힘든 마음의 짐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지닌 경제력에 따라 내가 사회에서 차별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머릿속에서 어떤 경로로 처리해야 하는지 전혀 지식이 없었으니까요. 그 아이가 힘들었다는 걸 잊지는 말아야겠지만 이제는 그 어린아이를 좀 보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다독여서 말이지요.

불공정한 사회 시스템을 개선해야 한다는 당위와 별개로 각자의 처지에서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친절할 이유는 충분할 것 같거든요. 사회 구조의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타인을 기꺼이 포용하는 인간적 여유조차 잃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봤습니다. 창작자로서 타인의 고통을 얼마나 진실하게 조명하냐는 엄격함 또한 그저 제 자신을 향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친구의 동생이 쓴 책에서 그런 구절을 봤어요.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서로의 '애씀'을 응원해 줘야 한다고. 자매를 오해했던 저에게 하는 말 같더라고요. 호스피스 병동에서 오래 근무한 간병인이 한 이야기에 나오는데, 죽는 순간에 많은 사람들이 후회하는 건 그 어떤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에게 좀더 친절했어야 했다'는 거래요. 지금이라도 소식 끊겼던 동창을 멀리서나마 응원해 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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