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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n 28. 2023

'비정상거처' 유감


아침에 급히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보낼 곳이 있었어요.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하자 '비정상거처 이주지원 버팀목 대출 안내' 배너가 떴어요. 순간적으로 제가 보이스피싱을 노리는 가짜 홈페이지에 접속한 줄 알았습니다. 예전에 그런 일 종종 있었잖아요. 은행 홈페이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중국의 무슨 조직이 만든 가짜 은행 홈페이지였다던가, 그런 사기 사건이요.

‘비정상거처'라는 용어가 너무 생소하고 공식적인 기관에서 쓰는 단어로 적합하지 않아 보여서 잠깐 그런 사기를 의심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은행 자체적으로 이런 용어를 쓰는 건 아닌 듯해 찾아보니 국토교통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보도자료에 "비정상거처 거주자의 이주지원을 위한 무이자 대출을 신청하세요"라고 쓰여 있더군요.


주거 불안정에 시달리는 취약계층을 위한 사업의 취지는 좋아 보여요. 그런데 굳이 '비정상거처'라는 말을 써야 했을까요? 관련 법 조항이 '주거 취약계층 주거지원 업무처리 지침'이라고 되어 있던데 그렇다면 그냥 '주거 취약계층 이주지원을 위한 대출'이라고 써도 되지 않나요?

지하층, 쪽방, 고시원, 여인숙, 비닐하우스, 움막 등에 사는 이들이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런 시설을 일컫기 위해 '비정상거처'란 말을 썼다면, 대신할 용어는 많아 보여요. 불안정한 거처, 노후시설, 임시시설, 주거기준 미달 거주지 등, 전문가도 아닌 제가 지금 1분 만에 생각한 용어들이에요.


우리 사회는 꽤 오래전부터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어요. 정상성을 기준으로 거기에서 조금 비켜났다고, 함부로 '비정상'으로 낙인찍으면 안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신문에서도 '장애인과 정상인'이라고 쓰는 기자는 아무도 없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고 쓰지요.


저 어릴 때만 해도 '장애인'의 반대말에 '정상인'이 있었는데 사회 안팎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두 단어를 한 쌍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공기관에서 발표한 자료에 너무 대놓고 '비정상거처'라고 명명해서 당황스러웠어요. '정상거처'는 어디까지인가요? '비정상거처 거주자'라고 자신을 밝히면서 대출을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저는 어린 시절 자식을 소유물처럼 취급한 부모님한테 존중받지 못하고 컸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에는 대학도 가고 직장도 다니고 사회생활도 원만하게 해서 별 문제가 없는 줄 알았어요. 문제는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부터였어요. 그간 잠재된 마음속 분노가 한꺼번에 튀어나왔어요. 건드리면 봇물처럼 터질까 두려워 무의식 저 밑바닥에 꽁꽁 숨겨둔, 부모님을 향한 분노와 억울함, 서러움이 터진 둑 사이로 솟구치는 물기둥처럼 저를 휘감았어요.


그래서 개인상담도 했고 부모님과 거리를 두고 제 마음을 다스리려 노력한 시간이 꽤 깁니다. 부모님과 왕래가 없을 동안 제가 편안했냐고요? 건강한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지만 심리적인 부담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 번은 상담 선생님한테 여쭤 봤지요.


"선생님, 이렇게 부모님하고 왕래도 안 하고 사니까 뭔가 죄책감도 느껴지고... 이제 나는 정상적인 삶에서는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무거워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웃으면서 물어보셨어요.

"정상적인 삶이 어떤 건데요?"

"그냥 주말이면 부모님 만나러 가고, 전화도 하고, 그런 삶이요?"

"정상과 비정상은 누가 정하는 건데요?"

"글쎄, 누가 딱 정한 건 아닌데 막연하게 정상적인 부모 자식 관계라고 했을 때 전화하고, 자주 만나고 그런 게 떠오르거든요."

"겉으로 전화도 하고 서로 왕래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미움이 들끓는 부모 자식 관계도 많아요. 그리고 본인들은 잘 지낸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면을 들춰보면 부모가 다 큰 자식을 너무 억압하고 있다던가, 결혼해서 독립해 사는 성인 부부가 거의 유아처럼 지나치게 부모한테 의존해 산다던가 그런 경우도 많고요. 따지고 보면 그런 건강하지 못한 관계가 더 문제 아닐까요? 그들은 전화하고 주기적으로 만나니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니 김희경 작가의 <이상한 정상 가족>에서도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규정하는지 물으며 겉으로 평범한 '정상가족'의 아이들이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로 마음이 병든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네요. 그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어떤 가족 형태를 비정상으로 낙인찍으며 정상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었어요.


실제로 제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한 고등학교 남학생이 학교 화장실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해서 난리가 났었습니다. 그 화장실을 드나들었던 여학생들은 충격을 받고 일부는 불면과 두통, 공황장애 등을 호소하기도 했어요. 자세한 경위는 모르지만 경찰도 출동했었고, 그 학생은 퇴학 처분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동네 어른들이 모여서 그런 말들을 했어요. 아마도 이 아파트 아이가 아니고 저 길 건너 월세가 저렴한 빌라촌에 사는 아이일 거라고, '결손가정' 아이일 거라고, 정신이 '비정상'적인 아이일 거라고 말이지요. 모두의 짐작인지 바람인지 알 수 없는 그 이야기들이 한참 오갔는데 아이의 신원이 드러나니 반전이 있었어요. 해당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의, 그간 별 문제를 안 일으켜 온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범죄를 저지른 아이를 발견하자마자 구획을 나누고 그 아이는 우리 구역의 아이가 아닐 거라고 서둘러 단정 짓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사회가 개인의 개별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큰 구획만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자동적으로 정의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일까요? 평범한 중산층 아파트에 사는 아이는 무조건 괜찮은 아이일 것이고, 길 건너 저렴한 빌라촌에 사는, '결손가정'의 아이는 무조건 이상할 것이라고 정의해 놔야 내 아이가 이상한 아이로 의심받을 일은 없어서일까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라는 말이 정착되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교통 약자'나 '디지털 약자'라는 말이 생김으로써 우리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 떠올려요. 교통 약자를 위해 휠체어나 유모차가 굴러갈 경사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디지털 약자인 노인들이 핸드폰으로 철도 예약을 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른다는 사실도 상기하게 되고요.


말에는 그렇게 힘이 있잖아요.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에서 그 이동권이란 말도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에요.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김원영 작가가 경험했듯이 장애인은 이동하기도 어려웠고 화장실 시설도 미비해서 '오줌권'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지만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이 싸워서 '이동권'이란 단어를 획득했고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내게 됐잖아요.


장애인의 대척점에 있던 '정상인'을 '비장애인'으로 바꾸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싸운 긴 세월이 있었고 누구나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건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성숙했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사회적인 성숙을 따라가지 못하는 '비정상거처'라는 말이 유감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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