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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25. 2024

피식대학 논란을 지켜보며


우리나라 마당극은 지배층을 한순간에 웃음거리로 만들며 좌중을 폭소하게 만듭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코미디에 열광했던 건, 코미디 장르는 사람들 사이의 긴장관계나 사회갈등을 웃음으로 풀어주었기 때문이지요. 권력자와 지배층의 잘못을 가감 없이, 유머 한 스푼 얹어 비판하며 특별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마당극도 양반을 희화화하며 그들의 악행을 폭로하고 있잖아요?


과거 코미디에는 이런 모종의 저항정신이 조금이라도 이어져 왔던 것 같은데 요즘 코미디를 보면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피식대학.

언론에 많이 나와서 찾아봤는데요, 참 궁금해집니다. 왜 이들은 힘없는 소상공인, 할머니, 주민들 이런 분들을 희화화하고 무시하면서 깔깔깔 웃고 있는 건가요? 왜 이런 채널이 구독자 300만이 넘나요?


스탠드업 코미디의 선구자이며 그래미 상과 에미상을 다섯 번이나 받았던 리처드 프라이어는 달랐습니다. 흑인으로 태어나 겪어야 했던 인종차별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그야말로 코미디로 승화시켰죠. 관객들은 그의 입담을 들으며 깔깔대고 웃지만 그 안에는 '웃픔'이 있었고 한바탕 시원하게 웃은 다음에는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어요. 사창가에서 보낸 외로운 시절을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성구매자들이 우리 동네를 거쳐 갔고 제가 백인을 만난 것도 그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제게 와서 말했죠. '안녕, 엄마 집에 있어? 입으로 해주는 서비스 받고 싶은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프라이어는 거침없이 청중에게 말합니다. "나는 여덟 살 때까지 아이였어요. 그 후 깜둥이가 되었지요."라고.


익살스럽게 떠드는 이야기 속에 분노와 아픔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코미디라는 형식을 빌렸기에 그의 쇼는 광범위하게 퍼져나갔어요. 무거운 사회 다큐는 거부하는 이도 그의 쇼는 재미있어서 볼 수밖에 없었지요.(캐시 박 홍이 쓴 <마이너 필링스> 참고)


사실 프라이어도 처음에는 흑인이 주는 이미지를 숨기고 싶어 했어요. 우리나라에도 방영되었던 '코스비 가족'으로 유명했던 빌 코스비처럼, 백인들이 좋아할 만한 단정하고 건전한 농담을 흉내 냈어요. 그러나 스스로 사기꾼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라스베이거스의 유명호텔에서 공연하던 그는, 백인 유명인사로 꽉 찬 객석을 응시하며 어떤 깨달음을 얻죠. 그날 청중을 바라보던 프라이어는 마이크에 대고 말합니다. "내가 지금 씨발 뭐 하는 거지?"라고요. 무대에서 퇴장한 그는 이후 새로운 행보를 걷게 되고, 비속어와 적나라한 내용이 남발한 자신만의 애수에 찬 코미디의 세계를 열어 갑니다.


(프라이어와 달리 코스비는 비속어를 쓰는 코미디언들을 늘 꾸짖었는데, 정작 그 코스비가 무려 50여 명의 여성들을 성폭행하고 그 중에는 10대 소녀도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미국 사회가 충격에 휩싸였었지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K팝 스타, 방탄소년단과 만난 소감을 짧고 강렬하게 말해서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 코미디언이자 미국 정치 풍자 프로그램 <더 데일리 쇼> 진행자인 트레버 노아. 그는 태어난 게 범죄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온 그의 자전적 에세이 제목이 <태어난 게 범죄>인데요, 남아공에서는 인종 간 성관계는 5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지는 범죄였으니 흑인 어머니와 스위스인 백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 범죄의 증거였던 거죠.


그의 삶이 얼마나 험난했을지는 짐작이 되시죠? 그러나 그는 그 아픔을 딛고, 또 딛고, 또 딛고 결국 오늘날 미국에서가장 잘나가는 코미디언이 됩니다. 이런 그의 삶을 지탱해 준 것은 웃음이었고 그 원천은 어머니였습니다.


(엄마가 총에 맞고 죽는 줄 알았는데 기사회생하는 장면에서)


"전 엄마가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엄마를 잃게 되는 줄 알았다구요."

"아니지, 얘야, 아가 울지 마, 트레버. 내 말 들어. 넌 세상의 좋은 면을 볼 줄 알아야 해."

"뭐라고요? 엄마, 엄마는 얼굴에 총을 맞았어요. 좋은 면 따위는 없다고요."

"얘야, 아니다. 당연히 있다. 이제 네가 공식적으로 가족 중에서 제일 잘 생긴 사람이 되었잖니."


엄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깔깔 웃기 시작했다. 흐르는 눈물 속에서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는 마주 보고 미친 사람처럼 웃었다.


                                 -<태어난 게 범죄> 책 중에서



예전에 올라왔던 영상인가 본데 피식대학에서 나락퀴즈쇼라는 걸 하면서 문제와 보기를 이렇게 냈더군요.


"다음 중 가장 싫어하는 운동은?"


1) 3.1 운동 2) 흑인 민권 운동

3) 노동자 인권 운동 4) 여성 운동


리처드 프라이어와 트레버 노아가 그 굴곡진 삶을 이겨내고 코미디언이 된 과정을 아는 사람으로서 피식대학이 ‘흑인 민권 운동'을 보기에 올려놓은 걸 보니 참 기가 막히더군요. 나머지 보기도 마찬가지고요. 역사에 숭고한 일을 해낸 사람들을 굳이 조롱거리로 삼는 이유는 뭘까요?


언젠가 아이랑 공연을 보고 오다 '풍자'와 '조롱'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어요. 제가 그 차이를 명확하게 어떻게 정의할지 고민이라고 했더니 아이가 우문현답을 말했어요.


"엄마, 그건 쉬운 얘기잖아. 힘 있고 강한 사람들을 희화화하면 풍자고,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희화화하면 조롱이야. 풍자에는 비판정신이 있기 마련이잖아."


아이의 대답에 무릎을 쳤어요. 오래전 마당극에서 양반을 희화화한 건 평소에는 양반 눈치 보며 살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만큼은 거리낌 없이 양반의 위선과 무능을 드러내며 웃은 거죠. 힘없고 약한 사람들이야 평소에도 그 위에 층층시하 시어머니 같은 상위계층에게 무시당하고 살아요. 극에서까지 그들을 끌어들여 또 조롱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해학 또한 다릅니다. 예를 들어 흥부의 가난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건 '해학'적 표현으로, 풍자나 조롱과는 다르죠. 화자가 대상을 향한 애정, 안타까움 등 친밀감을 드러내고 있어서 백성의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맥락이 더 강합니다.)


진짜 힘센 곳은 못 건드리면서, 시골 가게나 할머니를 대상으로 조롱하면서 웃고 있는 코미디라니요. 우리나라 코미디는 저 오래전 조선시대부터 번뜩이는 저항 정신이 살아 있었습니다. 훨씬 높은 수준의 코미디 역사가 있었으니 부디 선배들의 기개를 더럽히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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