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단절녀의 구직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어떤 곳에서는 두 아이 엄마가 잦은 야근을 해낼지에 대한 걱정을 앞세워 거절의 뜻을 우회적으로 전하고 어떤 곳에서는 대놓고 나이를 이유로 면접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젊었을 때라면 눈길 한번 안 줬을 곳에서조차 거절의 수모를 당할 때면 대체 아이들 키우는 데 시간을 내준 중년 여성에게 왜 이리 야박한가 사회를 원망했다가, 이런 결과를 예상했으면서 왜 좀더 아이들 어렸을 때 박차고 나오지 못했을까 내 머리를 쥐어박다가, 마음이 천갈래 만갈래 복잡해졌다.
20대 취업 준비생이나 40대 취업 준비생이나 취업의 관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건 마찬가지다. 구직 활동을 하면서 자꾸 의기소침해졌다. 경력 단절녀는 적성과 능력을 살릴 직장 같은 건 꿈도 못 꾼 채 눈높이를 낮출 일만 남은 건가.
면접을 보고 진이 빠져 소파에 아무렇게나 몸을 구겨넣고 있었는데 뜻밖에 반가운 문자가 왔다.
"## 연구소입니다. 경력직 채용 서류에 통과되셨습니다. 필기 시험은 모월 모일입니다."
국책 연구소의 정규직 자리였다. 요즘 말로 신의 직장이란 곳. 공고 게시물의 조회수가 너무 높아서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서류를 냈을지 상상도 안 되기에 기대도 안 했다. 10명 정도가 서류를 통과했는데 필기 시험을 본다는 것이다. 블라인드 채용이라 학교도, 나이도, 성별조차 쓰지 않았다. 오직 경력 기술서와 자기 소개서, 대학 때 이수한 교과목 등을 갖고 심사한 결과였다.
"네 경력이면 그 연구소에 딱 맞아. 이번에 감이 좋은데."
전화기 너머 남편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듣고 보니 과거 내 경력과 공통 분모가 많아 보이는 일이었다. 관련 경력을 두고 필기시험을 봐야 했는데 사실 오래 전에 했던 일이라 얼마나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시험장에 가보니 다들 경력자라 그런지 분위기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나 같은 경력 단절녀가 낄 자리가 있을까?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집중해서 풀었는지 사무실 유리에 비친 내 얼굴이 뻘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시험장에서 나오자마자 고등학교 모의고사를 치른 수험생마냥 관력 책을 뒤져가며 내가 쓴 답이 맞았나 틀렸나를 확인했다. 몇몇 문제는 아슬아슬하게 맞혔는데 어떤 문제는 답을 빗나갔다. 아쉽기도 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초조한 며칠을 보냈는데 인사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은수씨 되시죠? 필기 시험 합격하셨으니 최종 면접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아, 네 정말요? 감사합니다. 저, 몇 명이나 필기 시험에 합격한 건가요?"
"세 명입니다."
3대1. 서류는 몇 명이나 접수했을지 예상도 안 되고 그 중에 통과한 사람이 10명이었는데 다시 3명으로 범위가 좁혀진 것이다.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내일 모레 면접인데 계절에 맞는 정장조차 없다! 부랴부랴 면접에 어울릴 만한 옷을 마련하고 거울을 보고 미친 사람마냥 중얼중얼대며 면접에 대비했다. 예상 질문지를 뽑고 혼자 묻고 혼자 말하고 온갖 쇼를 하면서.
당일 아침, 누군가의 조언으로 청심환까지 먹었지만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면접관들은 무례하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질문을 쏟아냈다. 블라인드 채용이라 그런지 결국 끝까지 학교나 결혼 여부 같은, 개인 신상에 관한 건 단 한 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오직 일에 대해서만 묻고 또 물었다. 예상치 못한 면접 분위기에 조금 당황했었나 보다. 생각했던 답안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건 덜 떨어진 대답들이었다.
결과가 발표되기까지는 1주일. 면접 장면을 끊임없이 재생하면서 그때는 이렇게 말했어야지 왜 엉뚱한 말을 했을까, 난 돌대가리인가 자책했다. 우울해하는 내게 '언니가 되면 좋은 거고 딴 사람이 되면 내정자가 있었으려니 생각해요.'라고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 유쾌한 지인도 있었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마음을 붙잡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바짝바짝 말라가던 나였는데 정작 '안타깝지만..'으로 시작된 불합격 문자를 받고나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서류에서 최종면접과 결과 발표까지 한달간의 여정. 한 달간 설레고 행복했었구나. 학생 때로 돌아간 것처럼 시험 준비도 하고 면접 연습도 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초조해 하기도 하고....한결 젊어진 기분이 들었다.
경력 단절녀라서 작은 회사조차 서류도 안 받아준다고 낙담했었는데, 사실 내 경력은 단절된 게 아니었나 보다. 오래 전 경력이지만 신의 직장이라는 연구소에서 그 경력을 인정 받아 최종 면접까지 가봤으니 말이다. 누군가는 경력은 '단절'되는 게 아니고 단지 '이동'하는 거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경력은 '완성'해가는 과정일 뿐이라고 한다. 뭐라고 하든 좋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는 나에게 모처럼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세상과 단절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소통하려는 이 땅의 경력 이동녀 혹은 경력 완성녀들 모두 힘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