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서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빨리 걸어?"
지하철 계단을 종종거리며 내려가는데 뒤따라오던 아이가 묻는다.
"아, 그래? 서울 사람들이 유난히 빨리 걷는 것 같니?"
"어, 다들 바쁘게 걸어."
별로 의식하지 못했는데 아이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나 보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가방을 바짝 매고 걸음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신기했을까.
이렇게 정신 없고 바쁜 지하철 안에서 '선전전'이라는 걸 했었구나. 20여 년 전 대학생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며 정치 구호가 가득 적힌 선전물을 나눠주고 그것으로 부족해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00대학에 재학 중인 학생들입니다."로 시작하는 정치 생방송을 했었다. 확성기나 마이크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우렁찬 목청에 의지한 즉흥 연설이, 전동차 안을 가득 채웠다.
생각만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때는 어떻게 했을까? 쑥스러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작금의 정치 상황을 비판하며 노동자 민중이 탄압받고 있으니 시민들이 각성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기껏해야 스물 갓 넘긴 어린 학생들의 호소를 시민들은 귀담아 들어주었고 간간히 박수를 쳐주는 분들도 있었다.
요즘 이런 가두 정치를 지하철에서 시도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시끄럽다고, 니들이 뭔데 훈계질이냐고 돌 맞지 않을까. 하다 못해 인터넷 카페에서도 '정치 관련 발언 금지'를 내세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우리 카페 게시판이 정치 관련 발언으로 시끄러워지는 걸 원치 않습니다.'라고 공지한다. 소리 없는 인터넷 세상의 글자 소음도 못 견디는 세태인데 지하철에서 왕왕거리며 큰 소리로 정치 관련 발언을 하는 걸 용납 못 하리라는 건 뻔하다.
오랜만에 아이들과 가본 명동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볐지만 예전에 명동 성당 앞에서 볼 수 있었던 시위대나 농성 천막 같은 건 사라졌고 거리의 간판은 더욱 현란해졌다. 누군가에겐 시위나 농성이 '불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생존'이었다. 잡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긴장 속에서 공론화의 장이 열렸고 토론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토론 자체를 터부시한다. 정치 이야기를 혐오한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양비론은 누구를 이롭게 하는 건지 생각해봐야 하는데 말이다.) 각자 자기 앞가림이나 잘 하라고 한다. 서점에 가도 자기 영역을 지키고 선을 긋고 누군가 자기를 침해하는 걸 조금도 참지 말고, 자기 것을 지키는 데 목숨 걸라고 하는 책들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딱 봐도 대학 1, 2학년밖에 안 되는 어린 학생들인데 그래도 무슨 이야기를 하나 목을 쭈욱 빼고 귀기울여 듣던 그 어른들이 문득 그립다. 복잡하고 바쁜 지하철 출퇴근길에 지친 몸을 싣고 있을지언정, 이 세상 어느 구석진 곳, 누군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근심하며 듣던 그 얼굴들. 침묵이 강요될수록 사회적 약자가 더 불리해지는 건 아닐까. 사회적 시비를 가리는 데 드는 수고와 노력을 부정하면 결국 그 폐해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까. 뒤쳐진 사람들은 무시한 채 재촉하는 빠른 걸음은 누구를 위한 걸까. '우리도 서울 사람처럼 빨리 걸어보자'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쩐지 씁쓸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