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하는데 딸아이가 묻는다.
"엄마, 여성 전용 주차장은 왜 있어?"
"어, 글쎄, 여성들이 으슥한 주차장에서 범죄에 노출될 수 있어서 그런가?"
"남자는 범죄에 노출 안 돼?"
"물론 남자도 노출되지만 여자가 더 많이 노출되긴 하지."
"아, 남자 여자 그렇게 따지는 거 정말 별로야."
"네가 불편한 건 알겠는데 여자가 범죄에 더 많이 노출되는 건 팩트야."
"아니, 정작 여자들한테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별다른 처벌도 안 받고 나오는 경우가 많다며?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아. 여성 대상 범죄가 걱정된다면 그런 범죄자들을 강력하게 단속하고 처벌하든지. 그런 건 안 하고 웬 여성 전용 주차장? 임산부 전용 주차장은 이해하지만 여성 전용 주차장은 아니야. 여자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게 짜증 나. 게다가 저 선 색깔 봐봐. 분홍색이야. 진짜 별로다."
"............."
사실 처음에 아이가 물었을 땐 '아무래도 여자들이 운전에 서툰 경우가 많아서인가?'라고 말하려다 요즘 그런 말을 하면 펄펄 뛰는 아이 반응이 짐작되어 얼른 범죄 이야기로 화제를 돌린 건데 그것도 아이는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여자를 피해자나 나약한 존재로 보기를 거부하는 10대 딸아이 눈에 며느리 노릇을 힘겨워하는 엄마는 어떻게 보일까?
"엄마, 친구 00이네 집은 가족들이 모였을 때 여자들이 밥 차리면 남자들은 설거지한대. 아빠는 집에서는 그래도 가끔 하는데 왜 할아버지 집에만 가면 꼼짝도 안 해? 왜 할아버지 집에선 엄마랑 작은 엄마랑 할머니만 죽어라 일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옛날 분이셔서 그래."
"얘기해봤어? 분담해서 하자고?"
"분담? 그런 말을 어떻게 해?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그런 말이 통하겠어? 지난번에 엄마랑 작은 엄마가 둘다 아파서 누워 있으니 할머니가 혼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다 했던 거 기억나? 너희 아빠가 한다고 해도 끝까지 부엌에 못 들어오게 하셨잖아. 엄마도 아픈 와중에 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듣는데 마음이 참 불편하더라. 그래도 어쩌겠어? 그 분들이 살아온 방식이 그러니 이제 와서 바꾸자고 한들 말이 통하겠어?"
"왜 못해? 통할지 안 통할지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여자들만 그렇게 일하는 거 엄마도 엄청 불만 많잖아? 할머니가 그렇게 고집 피우는 거 엄마도 답답해 하고. 그리고 밥 먹다가 일어나서 시중들어야 할 때 엄마 표정 구겨지는 거 다 보여."
"..........."
"그렇게 인상만 쓰지 말고 엄마가 원하는 걸 말하면 좋겠어. 못하는 건 못한다고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 집에서 엄마가 대화도 좀 편하게 나누고 그러면 좋겠어. 엄마가 '나 여기 있는 거 정말 싫다'는 얼굴로 냉랭하게 앉아 있는 거 보기가 좀 그래."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별로 편하지 않아. 너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래서 엄마가 힘들었어. 그 일들에 대한 진상규명도, 사과나 화해도 없이 잘 지내는 척하기 싫어."
"진상규명이나 사과가 왜 없었다고 생각해? 엄마가 요구한 적 있어? "
"............"
"엄마, 난 엄마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불만을 가진 채 마음의 문을 닫고 지내는 것보다는 당당하게 원하는 걸 얘기하고 관계를 바꿔나가면 좋겠어."
요즘 아이랑 말하다 보면 자꾸 말문이 막힌다. 네가 아직 어른들 세계를 몰라서 그래, 라는 내가 생각해도 참 볼품 없는 답변으로 끝내기 일쑤다.